한때 도시락의 수혜를 단단히 입은 적이 있다. 때는 2011년 봄이었고, 어렵게 시간을 내서 일본 교토를 일주일 남짓 여행했는데, 환율은 기다렸다는 듯이 100엔당 1500원대까지 치솟아 나를 압박해오던 터였다. 한국에서 먹던 수준을 따르면 청구서를 쥐고 망연자실했고, 한국에서 먹던 가격을 따르면 음식의 양도 질도 빈틈없이 조악해 여행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러자고 내가 여기까지 왔나?)마저 일었다. 게다가 일본이 어떤 곳인가. 그 무엇을 먹든 양이 적어서, 한국인 여행자라면 하루에 다섯 끼를 먹게 된다는 마성(?)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던 중에 아내가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빠듯한 여행자를 위한 최고의 장소를 발견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마루이 백화점이 있는데, 매일 저녁 5시부터 도시락을 반값에 파는 ‘폐점 세일’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까운 편의점에도 온갖 도시락이 즐비하지만, 그것은 저렴한 가격만큼이나 품질이 안타까운 수준이라서, 돌도 부서뜨려서 먹을 나이를 지난 중년 부부에게는 가혹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사실 평상시 같으면, 여행 재미의 반은 ‘식도락’이라는 생각에 시큰둥해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교토에 빼곡히 포진한 박물관이며 사찰, 미술관 등지를 훑으며 도록을 사느라 허리와 지갑 사정이 한데 휘청거리는 와중이라서, 나는 옳거니 하고 반색을 했다. 결국 삼대째 내려온다는 라멘집에 가려던 것을 미루고, ‘데파치카(백화점 지하 식품관)’로 가서 탐색전에 들어갔다. 두툼한 계란말이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장어구이, 황금빛 튀김옷이 바삭바삭한 식감을 전하는 돈가스, 초밥 위에 다양한 생선회가 흩뿌려진 지라시즈시 등등 용기도 고급스럽고 색감도 근사하고 데코레이션에도 정성이 깃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유쾌해졌다. 과연 여기가 ‘도시락 왕국’이로구나 싶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여행 마지막 날까지, 마루이 백화점의 ‘반값 도시락’은 나의 교토 여행을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차가운 얼음물로 채운 욕조에 발을 담그고, 시원한 맥주와 곁들여 먹는 도시락 맛은 고된 여정에 대한 조촐한 보상이자, 교토의 밤 나들이를 준비하는 간결한 쉼표 구실을 했다.

나는 요즘에도 도시락을 먹는다. 차이는 ‘시판 도시락’이 아니라 아내가 만든 ‘홈메이드 도시락’이라는 점이다. 전고점을 갱신해가며 상승하는 내 혈압을 누그러뜨리겠다고 아내가 내린 특단의 조치다. 사실 내 혈압은 ‘발아현미 잡곡밥’보다는 ‘아내의 잔소리 중단’을 더 반길 테지만, 새벽부터 일어나서 매일같이 점심용과 저녁용으로 두 개의 도시락을 싸는 수고를 생각하면 목이 메어서, 그런 오만방자한 말은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쌀눈이 살아있는 발아현미의 힘인지, 채소 위주의 담백한 식단 덕분인지, 도시락을 싸서 다닌 지 두 달 만에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빠졌고 지금도 조금씩이나마 내림세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그런데 요즘엔 나 같은 사람 외에도 도시락 인구가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월급은 제자리걸음인데 밥값은 5천 원짜리 메뉴를 찾아보기 어렵게 상승해 점심값을 줄여보고자 하는 이유가 첫 번째요, 식당에 오가면서 허비하는 시간을 아껴서 잠시 눈을 붙이거나 어학공부를 하는 등 점심시간을 알토란 같이 활용하겠다는 이유가 두 번째다. 자연히 도시락 업계의 경쟁도 불이 붙었다. 한 편의점 업계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시락 매출은 매년 40~50퍼센트 상승세를 이어왔다”면서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락 시장이 성장하려면 1인 가구, 노인 인구, 워킹맘이 늘어나야 하는데, 인구구조와 세태의 변화가 딱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듣자니, 국내 도시락 업체 간의 경쟁만 뜨거운 게 아니라, 포화 상태에 이른 일본의 외식 브랜드들도 속속 한국 진출을 서두르거나 그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 ‘도시락 한일전’의 승자는 누가 될까. 도시락에 관한 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본 외식업체의 현란한 노하우에, 가랑비에 옷 젖듯 시장을 잠식당하게 될까. 알다시피 20첩 한정식을 손바닥만 한 도시락에 압축해내는 일본 특유의 세공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난 터다.

하지만 한국인의 취향과 식습관은 일본인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본인들이 세련된 색감을 강조하는 ‘눈으로 먹는 도시락’을 지향한다면, 한국인들은 어디까지나 다양한 풍미와 푸짐한 느낌을 중요시한다. 이런 한국인들에게 자칫 일본식 도시락은 칼칼한 데가 없이 밍밍하며, 모형 음식처럼 생뚱맞은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도시락 인기가 점심시간만이라도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한국인들은 도시락 역시 우르르 모여서 먹는 특유의 집단적인 문화가 있다. 어쩌면 이 대목이 ‘도시락 한일전’의 승부 포인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