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여인들》
- 이덕일 지음
- 옥당 펴냄
- 1만8900원

《세상을 바꾼 여인들》은
고대에서 근대까지 시대별로 활동했던 여인들,
특히 진실이 은폐된 여인들에 대해 정확한 사료에 근거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딸 가진 게 죄인이라는 말은 어디서부터 나왔을까. 결혼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혼수와 예단은 언제부터 미풍양속이었을까. 여자이기 때문에 모든 걸 참아야 한다는 못된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 어른들은 “옛날 조선 시대 여인네들은 정절을 지키며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옛날은 이보다 더 힘들었는데 요즘 것들은 남편과 시집을 우습게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시집을 우습게(?) 안 여인네들은 많았다. 남편이 아내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 혼수와 예단을 등이 휘어지도록 차려 와야 했다. ‘아내의 노동력’을 대신해 노비와 의복, 살림살이를 대신 지급했다. 게다가 신랑의 노동력까지 친정에 받쳐야만 신부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여성은 대접받고 살았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여성상위 시대였다. 신라 시대에는 미실이라는 여성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등 신라의 왕들 꼭대기에 군림하기도 했다. 기원전으로 올라가면 나라까지 창건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드라마 〈주몽〉으로 유명해진 소서노는 아들들과 함께 백제를 창건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새 책 《세상을 바꾼 여인들》은 후대가 만들어놓은 이미지에 가린 여인 25명을 통해 당시 여성상과 권위를 재조명한다. 책은 고대에서 근대까지 시대별로 활동했던 여인들, 특히 진실이 은폐된 여인들에 대해 정확한 사료에 근거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대중이 폭넓게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또 정조 독살 등 역사적 미스터리 등을 각 장별로 기술해 놓아 보다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첫 페이지에 “여성과 남성이기 이전에 인간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라고 적을 정도로 그 시대의 여성을 하나의 인간 그 자체로 보려고 노력했다. 억압받는 여성이 아닌 주체적이었던 그 시대 여성들과, 권위의식이 아닌 포용으로 여성들을 존중해 줬던 남성들의 모습을 자세하게 서술했다.

대표적으로 5만원권 화폐 초상인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신사임당에 대해 현모양처가 아닌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았던 한 여인으로 풀이했다. 저자는 신사임당이 존재했을 당시의 조선 시대는 남존여비 사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결혼한 여인이 시집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부모를 봉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신사임당은 여필종부가 의미하는 좋은 아내는 아니었다. 그 당시 여인들은 몇 년 동안 친정살이를 했으며, 친정살이에 대해 남편도 불만을 털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부인이 편찮은 장모님을 편하게 모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다.

그 당시 각자의 부모님을 존중하며 최고의 유교가치인 ‘효’를 숭상해 왔던 것이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의 효행을 《이씨감천기》라는 책으로 기술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부모 봉양을 위해 16년간 남편과 떨어져 살았던 이씨의 행동에 감복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씨는 열녀로도 추대됐다. 신명화가 장모의 사망소식을 듣고 강릉으로 달려가다 병이 들고 말았는데, 이씨가 손가락 두마디를 잘라 병을 낫게 했다는 것이다. 비록 16년간 떨어져 있었다 해도 남편을 향한 존경과 희생은 열녀로 추대하게 만들었다.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에게 ‘현명한 어머니(賢母)’가 아닌 ‘백세스승’이었다. 그의 평생 정치철학이었던 이기일원론은 화합을 강조했던 신사임당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풀이됐다. 저자는 “이이가 사람 분당을 아파하고 당론을 조절하려는 조제론을 펼친 것도 집안 사람들을 화평하게 끌고 가는 사임당의 집안 경영에서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의 기황후와 천추태후 등 여걸들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 사례로 유명하다. 기황후는 죽음의 길이었던 고려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의 정치싸움에 승리한 여인이었다. 비록 부패한 외척들로 인해 원나라에서 이뤘던 그녀의 업적이 무시되기도 했지만, 고려 공녀들의 권위를 세우고 노비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녀였다.

천추태후는 조선 유학자들이 기술한 《고려사》로 인해 ‘대표적인 불륜 왕비’로 인식됐다. 고려 전통과 고려의 독립성을 위한 활약상은 철저히 삭제된 채로 말이다. 그녀는 주체적인 고려를 위해 불교 전통을 살리고 거란과의 실리외교를 주창했다. 중국식 유학 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유학자들은 정적인 그녀를 내몰고 그녀의 치적을 폄하했다.

저자는 고려 여걸들의 활약상을 강조하며 당시 이들이 개척하고자 했던 정치철학과 신념 등을 자세히 풀어놓고 있다. 특히 천추태후와 같이 경종의 왕비였던 황보씨가 왕욱과 사랑해 현종(목종 다음 국왕)을 낳은 것에 대해 일절의 비판을 가하지 않은 점을 조목조목 따졌다.

그녀들을 통해 저자는 현대 역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시 여성들이 남성의 삶에 종속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든 역사서는 남성들이 썼기 때문에 한 여성의 실제 삶보다 훨씬 종속적인 인물로 그려지거나 그 의미가 대폭 축소되기도 했다. 이 책은 그런 여성들의 실제적 삶을 추적해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유형의 여성들이 당시는 물론 오늘날 일반적인 여성상을 대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진보할수록 이런 여성상들이 계속 등장할 것이라는 점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여성을 하나의 인간으로 봤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남성과 여성을 편 가르는 내용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이 그녀들을 폄하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장점만이 부각돼버린 점도 없지 않다.

하나의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해야 하지만, 그녀들과 그녀들 주변 남자들이 어떻게 서로 존중하고 평등해 왔는가를 보다 강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은 이 땅의 모든 아들들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의 딸인 동시에 남편의 부인이고 형제의 누이들이다. 저자는 남성들이 이를 인식해야 바람직한 양성 평등사회로 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희 기자 wooang1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