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외화벌이 파독 간호사·광부들의 쉼터 한국식 실버타운

경상남도 남해군 삼봉면 물건리 입구에는 ‘독일마을’이라고 표기된 빗돌과 함께 독일식 집들이 언덕을 따라 그림같이 늘어서 있다. 빨간 지붕과 흰색 콘크리트 소재의 2층집들이 대문 안에 넓게 펼쳐진 정원이 인상적이다.

언덕 아래로 계단식 밭과 푸른 빛 바다가 광활하게 자리잡고 있어 경관이 뛰어난데다, 따뜻한 기온 덕에 겨울 날씨에도 곳곳에 푸른 잔디와 샛파란 나무 잎사귀가 눈에 띈다.

이곳이 최적의 자연조건을 자랑하며 입소문으로 널리 알려진 남해 독일마을이다. 1960~1970년대에 외화획득(그 당시 수출의 30%차지)을 위해 독일로 건너간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 등 청춘남녀 2만명이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청춘을 불사르고 살다가 다시 귀국해 정착한 고향이자 쉼터다.

원래 고향들은 다 다르지만 은퇴이후의 고향은 남해 독일마을로 모두 같다. 이곳에서 마을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독일인 부부를 만나 은퇴이후의 생활과 독일 마을을 통해본 한국식 실버타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들어봤다.

우춘자(75)-빌리 앵엘프리드(81) 부부는 독일마을이 자리한 언덕 중턱 부근 ‘하이디 하우스’의 주인이다. 우 씨는 33살 무렵까지 경상남도 거창군의 한 보건소에서 근무하며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살고 있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밖에서 일하는 우 씨의 집안 살림은 대부분 딸이 도맡아 했다.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한 기억도 가슴에 사무친다. 끝내 가난한 생활이 자녀들에게 죄스러웠던 우 씨는 당시 독일에 파견되는 간호사에 자원했고, 아이들과의 생이별을 감내한 채 독일에 건너갔다.

그때부터 33년간 우씨의 독일 생활이 시작됐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완전히 다른 독일에서 혼자 외롭게 생활하며 한국에 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병에 지독히 괴로웠던 세월. 우씨는 41세에 지금의 빌리를 만나 재혼했다.

독일마을 전경.


가난 떨치려 두 자녀 두고 독일행

번 돈을 꼬박꼬박 한국에 남은 가족들한테 부쳐오다, 어느 정도 돈을 마련한 후 독일에 입국한지 16년째 되던 해에 우씨는 가족을 만났다. 자녀들을 독일에 초청한 것.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재회한 자녀들의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과, 특히 숙녀가 된 작은 체구의 첫째 딸의 모습을 보면서 우씨는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남편인 빌리 씨는 독일에서 항공계통의 일을 했다. 우씨는 63세에 정년 퇴직을 하고 빌리 씨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김두관 군수가 남해에 독일인 마을 조성 계획을 세우고 입주자를 모집했다.

돈을 입금하면 집까지 다 지어주는 조건이었다. 물론 착실히 경제적 기반을 다져오며 저축을 해온 부부들에겐 가능한 액수였다. 하지만 그날 그날 살기에 바쁜 생계형 벌이를 하는 재독 교포들은 귀국하고 싶어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현재까지도 독일에 남아 있는 당시 광부, 간호사 출신의 한국인들이 1만여 명에 달하는 까닭이다.

우씨의 귀국행은 남편 빌리씨의 배려가 큰 힘이 됐다. 33년간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던 아내 우씨에게 인생의 후반부를 고향에서 보낼수 있도록 선물을 해준 것. 빌리씨는 자신의 고향인 독일을 떠나서 아내를 위해 이역만리인 한국에서 인생2막 시작을 기꺼이 결심했다. 빌리 씨의 아내를 향한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 독일마을에 정착한지 9년째. 빌리 씨는 독일마을 주민들과 친분을 쌓았고 특히 자신과 같이 한국인 부인을 따라 마을에 온 독일인들과는 정이 두텁다. 이웃집에 사는 루드빅(83)씨와는 서로의 집을 자주 오갈 정도로 친분이 깊다.

한국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인사나 기본 표현 몇 가지 정도는 말하고 쓸 줄 아는 능력도 아내의 도움 덕분이다. 그러나 독일마을 주민들은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기에 한국어를 잘 몰라도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빌리씨의 설명이다. 쇼핑이나 웬만한 서비스 예약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 영어를 잘해 마을에 놀러오는 젊은 관광객들과는 영어로 소통하기도 한다.

빌리 씨는 한국 생활에도 잘 적응하고 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빌리 씨에게 남해군은 최적의 자연 환경을 제공한다. 매일 바깥에 나가 바닷가 주변을 산책하며 맑은 공기를 쐬고, 아내의 관리 덕에 식이요법에도 신경을 쓴다.

빌리 씨는 악기와 컴퓨터 다루는 솜씨도 능숙하다. 집에서는 주로 전자 피아노 연주와 인터넷 서핑에 시간을 보내는 것. 인터넷 서핑으로 밤을 새기도 한다. 빌리 씨는 “한국에서 접할 수 없는 독일의 뉴스와 다양한 소식을 접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2년마다 한 번씩 독일에 가 가족을 만나기도 한다. 빌리 씨에게도 60대에 접어든 자녀가 2명 있다.

남편을 극진하게 생각하는 아내 우씨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면 병원이나 의료시스템이 없어 건강노후가 보장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립 이후 정부의 지원부족 아쉬워

부부가 함께 하는 활동도 눈길을 끈다. 매주 수요일에는 근처에 있는 산을 등반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마을 보건소에서 생활체조를 배운다. 물건리 주민들은 여기서 배운 생활 체조로 경남이나 전국 단위의 대규모 대회에 출전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는게 우씨의 설명이다.

빌리 씨는 체조를 배우는 주민 중 유일한 남성이다. 처음에는 우 씨의 손에 이끌려 갔지만, 이제는 제법 즐겁게 체조를 배우고 있다. 우 씨 역시 남편과 함께 독일마을에 거주한 이래, 원할 때마다 자녀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는 입장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아들과 달리 딸은 자주 찾아와 엄마와 지난날 못다한 얘기들을 나눈다.

어느덧 70대 중반에 접어 들었지만 에너지가 넘쳐 얼마전 우씨는 운전면허 자격증을 취득했다. 매일 동네에서 운전 연습을 하느라 바쁜것도 이 때문이다. 우씨가 운전을 배운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하고, 혹여나 남편의 건강이 악화돼 위급한 상황이 찾아오면 신속히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을 극진히 생각하는 우씨에게 걱정이 하나 있다면 마을 주변에 병원이나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아 건강한 노후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 마을에 정착할 당시에는 위급 상황에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담당 의사가 달려 오는 의료 서비스를 약속 받았다.

그러나 김두관 군수의 임기가 끝난 후 애초에 지원을 약속받았던 계획들이 대부분 무산됐다. 가로등이나 주차장 등의 시설도 미비하다. 저녁이 되면 어둑어둑해진 마을에 불빛이 없어 주민들은 불편을 느낀다.

우 씨는 “아직도 독일에 남아 있는 교포들은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산다”며 “그 사람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이곳 마을에 함께 와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독일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거주하는 1층을 빼고 2층의 남은 공간을 민박으로 운영한다.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적합한 까닭에서다. 청소와 관리를 대부분 집 주인이 하는데다, 한 집당 1~3실을 운영하기 때문에 구석구석 손길이 잘 닿아 쾌적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단지 숙박업 목적으로 마을 근방에 비슷한 형태의 집을 짓는 펜션들이 늘어났다는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애초 독일마을은 젊은 시절 타국에서 힘겹게 생계를 위해 일했던 이들이 여생을 편안히 보낼 공간으로 조성된 것인데, 어느덧 관광지로 전락했다는 입장도 있다.

9년전 외로운 아내를 위해 한국행을 결심한 독일인 남편 빌리씨는
이곳의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러워 평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모은 돈으로 자녀위한 원룸까지 마련

현재 60대 이상의 교포 출신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독일마을이,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교포 출신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게 마을 주민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우 씨 부부는 현재 평생토록 지급이 보장되는 독일 연금의 수혜자다. 과거 착실히 일하다가 정년 퇴직을 맞았고, 이후 달마다 개인차는 있지만 각자 꼬박꼬박 100만원 이상의 연금을 받는다. 부부가 노년을 살아가기에 문제가 없는 액수다.

또 일하면서 모아뒀던 비용과, 펜션을 운영해 들어오는 수입도 있기에 생활은 넉넉한 편. 성수기에는 위층 펜션에 손님이 많아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원하는 손님에게는 소시지, 빵, 치즈 등으로 구성된 독일식 식사도 제공한다.

게다가 두 사람 다 독일에서 생활했기에 독일인 특유의 검소한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따라서 큰 지출 없이 주어진 환경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간다. 식사 때 먹는 상추와 마늘 등의 채소는 전부 우 씨가 집 마당에서 키운 것이라 식비도 크게 들지 않는다.

우 씨는 그간 모아둔 돈으로 마을 근처에 작은 찜질방과 원룸 아파트 한 채를 지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던 딸을 나중에 들어와 살게 하겠다는 계획에서다.

외롭고 힘들게 타지에서 고생했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라는 우 씨는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또 지금도 나이에 비해 건강하지만 “앞으로도 남은 날들을 남편인 빌리 씨와 함께 평안하게 살아가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젊은 시절 외로웠던 나를 잘 잡아준 남편 덕에 여기까지 왔다”며 “이 사람(남편)이 세상을 뜨면 그 때는 혼자서라도 독일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우 씨에게는 독일도, 한국도 모두 고향같은 나라다.

한국에 오면 독일이 그립고, 독일에 있을 때는 한국이 그리워지는 연유에서다. 자녀들에게 충분히 잘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 또한 크다. “나이가 더 들어서 만약 건강이 나빠져 자녀들에게 짐이 될 때를 대비해 떠나고 싶다”며 “친구도 많고 의료 시스템도 잘 발달한 독일에서 제2의 노후를 맞고 싶다”는 우씨에게서 지난날의 상처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기도 했다.

한편 빌리 씨는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해 금방 친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빌리 씨가 평생 한국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다.
노년을 친구같은 동반자로 함께 하는 두 사람에게는 상대 배우자의 고향이 곧 자신의 고향인 셈이다.

백가혜 기자 lita@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