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억대 연봉 보험맨을 매료시킨 오래된 책 곰삭은 지식의 향기

서울 신림동 고시촌 입구, 일명 녹두거리에 위치한 한 중고책방. 50평 남짓한 공간에 어림잡아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책들이 빼곡하다.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가수 혜은이의 옛 노래가 귀를 울린다.

바닥 한구석을 가득 채운 책들을 헤치고 김광석씨가 나온다. 44살의 나이. 도사를 연상케 하는 긴 머리의 범상치 않은 외모. 다소 무뚝뚝한 표정의 모습. 그는 이 책방의 주인장이다.

첫인사를 마치고 나니 곧 무표정함은 사라지고 웃는 얼굴로 커피 한 잔을 대접한다. “서울에, 아니 전국을 통틀어 이만한 중고책방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하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책들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어요. 말이 중고책이지, 깨끗해서 새 책이나 다름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의 눈빛에서 자신감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15만권 보유 월 2000만원 매출

헌 책이 아니라 중고 책이라 불러 달라는 그는 스스로 좋은 책을 유통하는 사람임을 자처한다. 그리고 이곳에 터를 닦은 지 5년 만에 인터넷 판매까지 합쳐 월 2000만 원의 매출을 올리는, 꽤 성공한 중고서점으로 만들었다.

알고 보니 외국계 보험회사에서 억대 연봉을 받던 영업 맨이었다는데, 중고 책에 인생을 걸었단다. 마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나이에 일찌감치 자신의 길을 정하고 인생 2막을 시작한 이 남자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도동고서(道洞古書)’. 책방 이름부터 특이하다. 김 사장이 자신의 종가인 ‘조선 5현’의 수장 환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에서 따왔다. 이곳은 유난히 단골들이 많다. 보유한 책만도 15만 권을 훨씬 넘는다.

실용서, 소설책, 인문학, 문화예술, 종교에 고서, 수입서적, 만화까지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중고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싼 가격이다. 새 책 값의 40~50%다. 값도 잘 깎아준다. 그날 기분이 좋으면 인심은 사정없이 후하니 책방을 찾는 손님들은 운수대통한 날이다.

무엇보다 이곳 책의 품질은 다른 데와 비할 수 없이 훌륭하다. 깨끗한 것은 물론 책 유통량이 많아 흐름이 빠르다. 여기에 다른 헌 책방에서는 볼 수 없는 바코드 시스템까지 구축했다. 대형서점 못지않다.

“대부분의 중고책방들이 오로지 주인장의 기억력에 의존해 책을 찾고 있어요. 바코드 시스템을 활용하면 책 위치를 빨리 찾을 수 있고 관리가 손쉽죠.” 얼마 전부터는 온라인 책 판매 사이트도 열어 매출 증대에 한몫하고 있다.

“이거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라며 기자에게 귤을 건네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다. 그 푸근한 마음씨야말로 도동고서를 자꾸 찾게 만드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말투가 퉁명스러운 것 같지만 그 속에는 특유의 털털함과 친근함이 배어 있다.

고객과 스스럼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가족의 안부도 묻는 풍경이 정겹다. 대화를 통해 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책에 대해 새로운 정보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도동고서의 성공은 반값에 장만하는 양질의 도서, 체계화된 시스템. 따뜻한 인간미, 3박자를 두루 갖췄기에 가능했다.

“양질의 책을 구비한다면 중고책방 사업은 블루오션입니다.”
중고책방의 경쟁력은 무엇보다 양질의 책 구입에 달려 있다고 김 사장은 강조했다. 그의 책 수집 능력은 자타가 공인한다. 좋은 책을 구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책방, 명함, 운송 차에 새겨진 ‘세상의 모든 책을 삽니다’란 문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직접 지은 글귀다. 좋은 책만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김 사장은 서점 운영에 다년간의 보험 영업 경험과 노하우를 접목시켰다. 가정집, 이삿짐센터 등 책이 버려질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수거한다. “직접 연락하면서 발로 뛰는 적극적인 영업이 제 강점입니다. 좋은 책을 구하려면 좋은 책을 소장할 만한 사람을 만나면 돼요. 보험 영업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고객에 대한 접근성이 중요하다는 거죠. 책에 대한 선구안도 길러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어요.”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문구를 내걸면서 효과도 톡톡히 보고 있다. 중고 책을 팔러 오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 일간지에도 같은 문구로 광고를 냈는데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 인터뷰 내내 그의 휴대전화 두 대가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걸려오는 전화가 하루에 100여 통 정도라고.

책을 구하기 위해 만사 제쳐두고 출동했는데 만약 허탕을 치게 된다면? 그래도 괜히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냐며 낙관론을 펼친다.

그는 참 부지런하다. 신간 등 좋은 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신문을 꼼꼼히 보는가 하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특히 열심인 건 고전과 한문을 비롯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주로 어학이다. 책을 취급하는 사람이라 독해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회화는 안 되더라도 해당 외국어로 된 책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수준이다.

그의 차와 명함엔 ‘세상의 모든 책을 삽니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좋은 책만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게다.

노력할수록 더 큰 부가가치 창출

김 사장이 책을 들여오면 책방 정리 및 관리는 주로 그의 아내 몫이다. 그가 이렇게 중고 책에 제2의 인생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동갑내기 아내의 도움이 컸다.

처음엔 창업 전선에 뛰어들겠다는 남편 말에 당황했다고.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섣불리 모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대했지만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 김 사장은 갑자기 어느 날, 억대 연봉의 안정적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했다. 원래 법학을 전공하고 수년간 고시공부를 하다가 결혼하면서 할 수 없이 들어간 직장이 보험회사였다.

“실적 중심의 보험설계사 일은 너무 버거웠어요. 고객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계약까지 이끌어내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어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표를 던지고 나왔지만 딱히 할 게 없었다. 부동산 일에 손댔다가 손해를 보기도 하고 동업자와 중고책 서점을 잠깐 운영하기도 하는 등 1년 동안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마음을 굳히고 차린 게 중고서점. 그가 꽂힌 아이템이 왜 하필 헌 책방이었을까.

“제가 워낙 책을 좋아하긴 해요. 새 책만 선호하고 중고 책은 거들떠도 안 보던 사람이었죠. 중고책방은 우연히 접했는데 의외로 좋은 책을 구하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보는 안목만 있으면 정말 가치 있는 책들을 저렴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그 뒤로 중고책방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어요.”

새 책이 아닌, 버려지는 책으로 사업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시선 역시 곱지 않았다. 남들은 헌 물건이라고 고물 취급을 하지만 자신에겐 귀한 보물이라는 김 사장. 중고 책에 대한 무한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김 사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직장을 그만 둔 것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전혀 없었어요. 정신만 차리고 세상을 밀고 나가면 안 될 게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지만 중고책방을 운영하면서 힘든 점은 없을까. “책 무게가 대단해요. 무거운 책 더미를 나르고 정리하는 게 힘들긴 하죠.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내가 있는 곳이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되는 겁니다.”

중고책방 사업은 노력하면 할수록 더 큰 부가가치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의 일이 천직인 것 같다는 그는 하루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에겐 또 하나의 꿈이 있다. 책방 안에 전문서적 코너를 만드는 것. “제대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어떤 책이든 쉽게 구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여유가 된다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역사나 철학 등 분야별 전문가를 초빙해 강연 시간도 마련하고 싶어요.”

그의 중고책 철학은 ‘리사이클’이다

보통 ‘중고’라고 하면 헌 것, 지저분한 것으로 인식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내게 중고 책의 개념은 ‘리사이클(recycle)’이다. 상점에서 산 물건이 내 가방으로 향하는 순간, 바로 헌 책이 되는 것이다. 굳이 중고라는 의미로 새 것과 헌 것을 구분지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냥 책인 것이다. 집에 있는 물건처럼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그저 좋은 자료와 정보로서 유통되고 있는 책의 하나일 뿐이다.

최대 성공 밑천은 ‘생각의 전환’

■부지런함 : 좋은 책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얼마나 파느냐에 달렸다.
하루에도 몇 백 권씩 입고되는 책들. ‘이만큼 책이 들어왔으니 됐겠지’ 하고 머무르는 게 아니라 양질의 책을 어떻게 가져와야 할 것이냐를 고민한다.

■가족애 : 나를 지지해주고 전폭적으로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아내에게 감사한다. 가족은 봐도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사람들이다. 여섯 딸을 보면 힘이 솟아난다.

■생각의 전환 : 생각을 바꾸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고물로 치부하는 중고 책으로 나는 돈을 벌고 행복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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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