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누군가 질문을 한다. "삶은 무엇인가"? 또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답한다. "계란이다." 잔뜩 기대하고 들었다면 허탈한 웃음을 지을수 밖에 없는 답변이다. 잘 나가는 사업가에서 은퇴 후 돌연 갤러리 대표로 변신한 이수문(63)씨와의 인터뷰 역시 ‘삶은 계란’ 같았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진지하게 답하는 것 자체가 진부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그는 ‘삶은 계란’이라는 말처럼 허를 치면서도 유머러스한 답변으로 자신을 보여줬다.

파란 색도화지 위에 빨강, 노랑 색종이를 잘게 오려 뿌린 듯 유난히 가을빛이 선명한 날 오후 파주 헤이리 마을을 찾았다. 합정역 앞에서 2200번 버스를 타고 40여 분간 달려 헤이리 마을 1번 출구 앞에서 내렸다. 출발 전 갤러리 직원이 전화로 알려준 대로 3번 출구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보면 금산갤러리가 보이고 우측으로 돌아 조금 걸으면 헤이리의 가장 중심지인 연못과 갈대가 어우러진 갈대 광장에 '화이트블럭 갤러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처럼 가을 분위기가 완연한 거리를 천천히 음미하듯 걸었다. 천천히 걷다보니 평소엔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 하나둘 눈앞으로 다가왔다. 길가에 바싹 마른 낙엽이 바스락 바스락 쌓여가고 있고, 물가에는 갈대가 부들부들한 깃털을 활짝 드러내며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평일 오후인데 어떻게 시간을 낸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쾌활하게 웃으면 지나간다.

화이트블럭 갤러리는 이름 그대로 하얀 건물이었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하얗고 투명했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벽과 투명하고 큰 유리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3층짜리 건물이었다. 갤러리 정문 앞에서 보니 건물 1층에 독일작가 타티야나 돌의 3대의 스포츠카가 그려진 카(CAR) 시리즈가 눈에 띠었다.

갤러리는 지난달부터 개관전 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독일 화단과 미국, 유럽 전역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에버하르트 하베코스트, 타티야나 돌을 비롯해 독일 아방가르드 사진의 거장인 안톤 스탄코프스키(1906~1998)의 사진 작품들을 초청해 전시하고 있었다. 건물로 들어서자 갤러리 직원이 나와 이 대표는 현재 회의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5분 정도 전시실을 둘러봤다. 2층 전시실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이수문 대표를 만났다.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온 이 대표는 “나는 작품을 잘 몰라요. 우리 큐레이터한테 전시실 안내 받고 한 바퀴 둘러보고 와요. 나는 기사가 안 되는 사람인데 괜찮겠어요?”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냥 만나 뵈러 왔다고 답하자 “그래요. 편하게 이야기나 나눕시다”라며 그제야 마음을 놓는 모습이다. 인터뷰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나보다.

“낯선 일 만나면 도전의식 발동” 열혈 시니어
“모르는 분야라서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원래 낯선 데 뛰어드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이 나이에 새로운 일 벌이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어요?”
큐레이터의 소개를 받아 전시관을 10여 분 간 간단하게 둘러본 뒤 3층 회의실에서 이 대표를 다시 만났다. 갤러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자신의 호기심 많은 성격을 이유로 들었다. 은퇴하고 나서 심심했는데 마침 좋은 땅이 있어 갤러리를 짓게 됐다는 스스럼없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50+’란 코너가 은퇴하고 인생2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성격의 지면인 만큼 그래도 뭔가 교훈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며 근엄한 이야기 좀 해달라고 졸라대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본심을 내비친다.

“뭐든 10년은 해야 내가 뭘 모르는지 알게 되고 20년 하면 선수가 되는데 이제 출발점에 서 있으니 하나하나 배우면서 나가야지요. 우선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와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활동할 수 있는 판을 벌여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갑작스런 암선고 자신과 주변 돌아보는 계기
이 대표의 은퇴 전 직업은 레인지 후드 및 빌트인 가전 전문회사인 ‘하츠’의 대표였다. 경기중·고와 서울대 공대를 나온 이 대표는 한샘과 현대종합목재에서 16년간 근무한 뒤 하츠를 창업해 20년간 운영해왔다.

직장인으로서 사업가로서 그의 삶은 누가 봐도 성공 그 자체였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들어간 직장은 보르네오. 국전에서 건축설계로 국무총리상을 받고 학교 성적도 좋아 교수로부터 대학원에 진학을 권유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회사 돈으로 술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취직을 선택했다고.


일단 취직 후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에 집중했다. 심지어 추석이나 설 명절 때는 일부러 해외 출장을 잡을 정도로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었다. 심지어는 자녀들이 어릴 때 공장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아빠 모습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일에만 빠져 살았다. 조직에서도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압도적이었다.

“직원들을 많이 괴롭혔죠. 닦달하고 무능하다고 그만두게 하고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정말 많이 반성했어요. 그 직원은 그렇다 쳐도 그 가족은 무슨 날벼락이었겠어요.”

이 대표가 은퇴를 생각한 건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든 2003년 경부터였다고 한다. “55세쯤 되면 그만 두고 놀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회사를 물려줄 사람이 없더라구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2006년인가 우연히 건강검진을 하다가 신장에 암이 생겼다고 선고를 받았어요. 의사가 심각하게 회사 일을 그만 정리하고 쉬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더라구요.”

그렇게 은퇴를 했다. 몸은 수술을 하고 1년도 채 안 돼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완쾌했다. 쉬다보니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헤이리에 작가들이 많아 들렀다가 좋은 땅을 발견했다. 지금의 갤러리 자리다. 회사를 정리한 돈으로 땅을 샀다. 처음엔 그냥 멋진 집 하나 지을 계획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갤러리를 짓기로 계획을 바꿨다. 이왕 짓는 김에 여기에서 1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40세 미만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건축을 맡겼다. 그렇게 해서 화이트블럭이 탄생했다.

창작뮤지컬 ‘명성황후’ 제작 타고난 예술 ‘끼’
그래도 그렇지 그는 왜 상업갤러리를 인생2막의 주요 테마로 정했을까. 30여년의 세월을 기업인으로 살아온 그가 대체 미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어찌 보면 이 대표가 미술사업에 뛰어든 것은 그가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갑작스런 일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오래 전부터 문화·예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중·고교 시절부터 밴드부와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밴드부에서는 클라리넷을 불었고 대학시절엔 연극반에 들어가 오로지 연극에만 몰두했다.

“당시 탤런트 이낙훈씨가 연극반 선배였어요. 두꺼운 대본을 주고 캐릭터 분석을 A부터 Z까지 해오라고 했어요. A는 나이(age), B는 신체조건(body), C는 성격(characte) 등등 이런 식으로 등장인물을 분석해야 했어요. 그 덕분에 저는 앞날에 대해 점을 잘 쳐요. 여러 캐릭터를 분석하다보면 삶에 대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죠. 여태껏 별 어려움 없이 살았던 것도 그렇게 점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사회생활을 하고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틈틈이 단역 배우로 무대에 섰고 급기야는 1995년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해 세상에 선보였다.

“당시만 해도 세계 무대에선 우리나라만의 창작물이 드물었어요. 왜 그럴까 고민하다가 직접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보기에 당시 상황이 주변 열강에 휩싸여 신음하던 100년 전 상황하고 비슷했거든요. 그래서 명성황후가 떠올랐고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창작 뮤지컬을 만들게 된 거죠.”

그때부터 이 대표는 제대로 된 창작 뮤지컬 한 편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런던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를 직접 찾아가 현장 조사를 하는 것은 물론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이문열 작가, 윤호진 연출가, 박칼린 음악감독 등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모으고 주위 기업인들에게 투자를 호소했다.

“어느 날 상갓집에서 우연히 만난 조창걸 한샘 회장이 ‘너 연극판에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 작품다운 작품을 하나 못 만드냐’고 약을 올리는 거예요. 오기가 나더라구요. ‘뭔가 보여줄 테니 돈이나 대라’고 큰소리를 쳤어요. 하하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뮤지컬 막이 오르자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작 뮤지컬로는 최초로 화려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받게 됐다.

국내외 두루 포진한 문화예술 인맥 든든한 후원자
“요즘 생각해보니 허튼짓도 해야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걸 그대로 답습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출발부터 남들과 달라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죠.”

문화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노력은 그 주변에 인맥으로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다. 부인 차명희씨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고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저자인 이원복 교수는 학교 동문이다. 이 교수는 독일 유학시절 알고 지낸 미술관 전시기획 전문가인 클라우스 클렘프를 이 대표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클렘프는 화이트블럭 갤러리 개관전 전시 기획에 참여해 독일 현대미술 3인전인 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갤러리를 통해 돈을 많이 벌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아직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잘하면 5~6년 후에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것으로 본다”며 “다양한 문화 예술인들이 와서 미술에 공연 문화를 아우르고 젊은 화가들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창피하지 않게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의 최근 즐거움은 중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책 다시 읽기다. 그는 요즘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다시 읽고 있다고 했다. 책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짓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문화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인생2막의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은경 기자 keki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