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그을린 얼굴, 그러나 환하게 웃는 표정에는 신선한 오이 맛이 베어 나왔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비닐하우스에서 염소처럼 아무 상추나 뜯어먹는 그를 보면서 정직한 농부의 체취가 느껴졌다. ‘상추CEO’로 유명한 장안농장의 류근모 대표를 만났다.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 ‘장안농장’은 상추로 매출 100억원을 일군 유기농업계의 신화로 여겨진다. 장안농장의 류근모 대표는 1997년 조경 사업에 실패한 후 아내의 손에 이끌려 귀농, 융자금 300만원으로 유기농 상추 재배를 시작해 13년만에 매출 100억원대의 유기농 기업으로 일궜다.“농업이 한물 간 산업이라 여겨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 반대다. 농업이 구시대 유물이라서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희망이 없다는 그 생각이 농업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 농사에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에 희망이 없는 것이다.”사실 그가 귀농을 할 때는 원대한 꿈이 있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빌 언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서울에서의 사업 실패 때문에 등 떠밀려 들어온 곳이 충주였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시작한 감자와 땅콩 농사는 실패였다.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던 게 원인이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해볼 용기가 나지 않을 때 아내의 조언으로 다시 한 번 해보자고 나선 게 지금의 장안농장이었다.“농업에 새로 뛰어들 때 생각했던 게 있다. 초기자본이 적어야 하고, 수확기간이 짧아야 했다. 또한 자금 회전이 빨라야 했다. 이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채울 수 있는 게 채소밖에 없었다. 하지만 채소의 종류만 수십 가지다. 어떤 채소를 재배하면 좋을지 몇날 며칠을 고민했다.”가락동 시장 1년 탐색 끝 “결론은 유기농”류 대표는 전국의 채소 재배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그의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희망을 찾기 시작한 곳은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였다. 전국의 최고 농산물이 모이는 장소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채소는 무엇이고, 어느 정도까지 품질을 올려야 인정을 받는지 그곳만큼 정확히 알 수 있는 곳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1년간의 자료 조사를 마치고 유기농 쌈 채소를 재배하기로 결정했다. 생각은 하나하나 구체적인 색깔을 띠었다. 채소는 과연 어떻게 유통되는지, 어떻게 하면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것인지 틈틈이 관창하고 고민한 결과였다.그렇게 가락동시장을 드나들 때, 슈퍼나 대형마트에서 파는 일부 채소에서 다량의 농약이 검출된 사건이 터졌다. 류 대표는 이때 소비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안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과 수요를 읽었다고 했다.“살림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깨끗하고 건강한 야채를 원하지 않을까? 고급 채소, 안정한 채소의 시대가 열릴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농약을 쳐서 재배하는 채소나 과일이 점차 설 곳을 잃고 친환경 농산물이 차세대 먹을거리로 각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 말 이다.”류 대표는 농약 없이 친환경농법으로 쌈 채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친환경 태동기로 국가 차원의 인증제도 정착되지 않은 때였다. 하는 수 없이 친환경 채소를 키우는 고수들을 찾아다니다가 고향 선배인 이해극씨를 만나 친환경 농업을 배웠다. 이씨를 멘토로 삼고 날마다 찾아가 물었다. 어느 때에는 하루에 세 번씩 찾아가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쌈 채소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매일 아침 상추를 보러가는 길은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하지만 류 대표에게 시련이 없던 것은 아니다. 우선 농약에 대한 유혹이었다. “말이 그렇지 친환경농법이라는 게 손이 많이 가요. 잡초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지요. 쌈 채소 뒷면에 붙어사는 민달팽이도 그렇고요. 또 날아다니는 해충은 정말 대책이 없지요. 특히 잡초는 뽑고 돌아서면 다시 나오는 것 같아요. 일이 떠날 날이 없지요.”류 대표는 이 지긋지긋한 잡초와의 전쟁에서 질 뻔 하기도 했다.“한번은 진짜 농약을 샀어요. 아예 작정을 하고 6000원짜리 제초제 ‘근사미’를 사다가 분무기에 담아 비닐하우스에 들어가는데 아내가 농약 통을 붙들어요. 이제 와서 농약을 치면 그동안 고생한 의미가 없다고 말려요.”류 대표는 그때가 마지막 유혹이었다고 했다. 아내의 만류로 농약 통을 들고 나와 생각하니 아찔했다고 했다. 만약 그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사람들에게 유기농이라고 자랑한 것이 수포로 돌아갈 뻔 했던 것이다.

류 대표는 모두가 떠나는 현실에서 누구나 하는 생각이나 방법, 사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생산 마케팅, 상품 디자인 홍보까지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현재 장안농장이 지닌 ‘대한민국 최초’라는 타이틀만 무려 100여개에 달한다. 때문에 농업계에서는 ‘장안농장이 하면 모두 대한민국 최초’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다.류 대표는 일명 밭떼기와 도매상을 통한 판매방식을 뒤엎고 국내 최초로 채소를 우체국 소포로 판매했다. 친환경 쇼핑몰을 개설했고, 쌈 채소 축제, 쌈 채소 공원, 쌈 채소 박물관을 연 것도 같은 맥락이다.“이제 농산물만 팔던 시대는 지났다. 농업에 문화를 접목하고 상추에 감동을 담아야 한다. 누구나 똑같은 상품을 만드는 시절이라면 품질 좋은 상품이 인기를 끌 것이다. 누구나 값싸고, 품질 좋은 상품을 판다면 과연 무엇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인가. 좋은 상품만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좋은 상품을 넘어 감동을 주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마케팅 비법이다.”내달 64가지 ‘쌈채소 축제’ 놀러오세요류 대표는 최근 미국 ‘2012 애너하임 자연건강식품박람회’(Natural Products Expo West 2012)에 다녀왔다. 이 박람회는 지난 3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 열렸고, 세계 25개국 2000여개의 관련 업체가 참가한 행사다.“애너하임에 가서 많이 놀랐다. 그곳에서 본 모습은 앞으로의 5~7년이 지난 한국농업의 50년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현장에서는 두려움도 느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한국 농업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할 것이다.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천 길 낭떠러지에 몰릴 수도 있다.”이어 류 대표는 힘주어 애기했다.“사양사업이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농사에 뛰어든 이후에 농업이 호황을 구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살아남는 한 명은 존재한다. 살아남은 그 사람이 희망이다. 미리 한계를 긋지 말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길은 있다.”장안농장은 총 규모 13만평에 1~6농장까지 운영한다. 물류기지도 따로 있다. 류 대표를 비롯해 210명의 직원들이 함께 농업에 대한 희망을 열어가고 있다. 류 대표와 직원들은 요즘 제1농장에 새로운 쌈 채소를 모종하기에 바쁘다. 내달 20일 전후로 시작될 쌈 채소 축제 준비다. 지난해에는 구제역으로 행사를 지르지 못했지만 올해에는 64가지의 쌈 채소를 사람들에게 체험하게 할 생각이다.“지금 옮겨 심는 쌈 채소는 4월 20경에 초벌을 딸 수 있을 거다. 초벌을 따고 나면 본격적인 생산이 가능하다. 이때 장안농장을 찾아오면 쌈 채소 축제를 즐길 수 있다. 직접 농장에 와서 유기농업을 어떻게 하는지 눈으로 보고, 수확도 해보는 거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오면 여기서 수확한 채소로 식사를 할 수 있다.류근모씨가 제안하는 귀농 십계명1. 즉흥적인 마음을 버리고 단계적으로 준비하라=귀농은 ‘나도 농사나 지어볼까’ 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즉흥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엉겁결에 결정을 내리지 말고 최소 5년은 준비기간을 거쳐 단계적으로 접근하라.2. 가족과 충분히 상의하라=아무리 수십 년을 함께 살았던 배우자라도 내 마음 같지 않아서 자칫 가족사이의 불화로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 부부끼리 뜻이 맞아 귀농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하더라도 귀농현실에는 부딪힐 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3. 아름답지 않은 귀농을 생각하라=물 좋고 산 좋은 곳을 꿈꾸고 내려왔더니 강가는 멀고 뒷산에는 버섯하나 자라지 않는다. 낭만보다는 시커먼 산모기만 극성을 부린다. 더구나 농장 수입은 도시근로자 연봉보다 적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없다면 귀농은 한낱 꿈과 같다.4. 자신의 능력을 냉철하게 따져라=적은 수입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저돌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 직접 판로를 개척해 시장에 팔 수 있는지, 1부터 100까지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다.5. 도시생활과 연계할 수 있는 부분귀농을 하라=도시에서 살면서 익혔던 업무와 연계할 수 있다면 보다 현실적인 귀농이 될 수 있다. 예전에 도매업 경력이 있다면 자신의 농작물뿐 아니라 이웃의 농산물을 도매업과 연관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다. 부부 가운데 한 명이 농업 이외의 엄부를 맡을 수 있다면 도시 연계형 귀농으로 정착해보자.6. 지역 밀착형 귀농을 시도하라=귀농자와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지자체에서 마련한 교육프로그램이나 농업교육, 각 대학의 최고경영자과정처럼 좋은 프로그램을 빠지지 말고 찾아다니자. 성공적인 귀농 농가가 있다면 자신의 멘토로 삼고 1대1 멘토링을 시도하라.7. 귀농의 최종 목표를 설정하라=돈인가, 편안한 삶인가? 돈도 중요하지만 농촌 생활이 자신과 잘 맞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돈도 갖고 싶고, 남에게 자랑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는 결코 농촌에 정착하지 못한다.8. 주말농장은 잊고 실전에 가까운 경험을 해보자=텃밭을 가꾸거나 주말농장에 수십 명이 모여 채소 재배하는 일을 귀농 예비연습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혀 낯선 곳에서 100평쯤 농사를 지어보고 시설 원에에 취업해 6개월쯤 실습을 하자.9. 돈 벌려고 귀농하지 마라=떼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하면 백전백패이다. 농촌홍보 프로그램을 보면 다들 돈을 잘 벌고, 여유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오지만 이는 환상이다. 그처럼 돈을 벌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10. 고향 귀농은 재고하라=고향으로 귀농하면 장점이 많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혈연, 학연이 있으니 관공서 지원이나 민원 문제는 손쉬울 수 있지만 정작 농사 자체는 혈연이나 학연이 해결해주지 못한다.한상오 기자 hanso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