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 COMPANY > 창업
장애도 시련도 막지 못한 연애(蓮愛)

연농사로 연매출 7억~8억원을 올리는 이상근씨는 연(蓮)박사로 통한다. 단양에서 연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농사법을 강연하는가 하면 연가공품 개발을 위한 연구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에겐 65세 전에 연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겠다는 꿈이 있다.

“농사는 힘이 들지만 힘들인 만큼 확실히 돈이 됩니다.” 연(蓮)박사 이상근(49)씨가 강연회에서 말하곤 한다. 귀농을 하려는 사람을 만나도 언제나 펼치는 지론이다. 귀농 19년차인 그는 연농사로 연간 7억~8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연은 성실하게 일하면 최하 월 120만원 이상은 법니다. 게다가 숙련된 기술을 가진 성인남성이 하루 종일 매일 일해 5000평 정도 경작하면 연봉 1억원은 거뜬히 넘길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약 3만평 밭에서 연을 재배한다. 거기다가 연식혜와 국수 등 30여종이나 되는 연가공품들을 판매하고 식당을 운영하니 소득이 쏠쏠한 편이다.

“연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꽃은 차로 우려 마시고 잎은 밥을 지어먹지요.”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선 연과 관련된 지식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매일 들여다보는 데도 질리거나 지겹지 않은 모양이다. 끊임없이 연의 특성과 효능에 대해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연과 깊이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진정한 ‘연애인(蓮愛人)’이다.

“동의보감에서도 연을 써서 안 낫는 병이 없다고 합니다. 차로 마시면 속병이 없어지고 산모가 아이를 낳고 하루 세 번 진액을 마시면 어혈이 풀린다고 해요. 나이 드신 분들이 아침, 저녁으로 꾸준하게 드시면 중풍과 뇌졸중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아토피에도 그만이구요.”

친환경 연농사 19년째 연식혜, 연국수 등 가공품 연구 정식 학위가 없는 그를 사람들이 ‘박사’라고 부르는 건 연에 대한 독보적인 지식과 경험,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가방끈이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만 연과 관련해서 국내에선 저만큼 연을 잘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자부합니다. 대학교수님도 저만큼 연을 알지는 못하더라고요.”

이 씨는 지금 충북 단양군 단양읍 별곡리에서 연식당을 운영한다. 3년 전 우연히 단양에서 열린 ‘단고을포럼’에 참가했다가 지역 군수의 제안으로 연을 특성화한 관광명소 사업에 자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가 개발한 메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연식혜와 연근국수 등이다. 특히 연식혜는 농사를 지으면서 품앗이를 나온 마을사람들과 인부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었는데 주위 반응이 너무 좋아 특허를 내고 상품화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일 할 때 술을 많이 마십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연꽃을 끊인 물을 한 잔씩 드렸더니 며칠 지나자 다들 속이 안 아프다고 해요. 연이 좋다는 걸 한 번 더 실감했죠. 겨울엔 차가 좋은데 여름이 되니 사람들이 다들 차를 안마시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마시게 할까 연구하다가 식혜를 만들어봤어요. 그랬더니 다시 다들 좋아하며 식혜를 마셨습니다.”

이 씨는 연을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하면서 다년간 연구해왔다. 2003년 11월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원으로부터 무농약 연근재배 인증서를 받았고 2005년 3월엔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신지식인농업인장(章)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받은 상만 해도 약 30종이 넘어 연식당 벽 한쪽 면을 빼곡히 채웠을 정도다.

이 씨는 특히 연재배만 아니라 연가공에 깊은 관심이 있어 연근재배기술을 비롯해 연근농축액 및 연근식혜제조 기술, 연화분재배 방법 등 특허증을 7개나 가지고 있다. 특허증 하나에 무려 5개씩 세부 특허가 인증돼 있어 모든 특허를 합치면 16개가 넘는다. 2006년 7월 농식품부 의뢰로 연근재배 기초논문을 제출했고 전국 곳곳을 돌며 농업기술센터 등지에서 29차례 강연을 했다. 연박사란 별명도 그때 생겼다.

지난 9년간 전국을 돌며 연농사 실태 조사는 물론 연재배법과 연가공제품 개발 기술 들을 강연했다. 그 결과 연과 관련해 낸 특허만 해도 10개가 넘고 3%대에 불과했던 국내 연근생산량을 6%대까지 끌어올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농림부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 연농사를 짓고 있거나 지으려는 농부들이나 그들을 지원하는 부서 및 관청 공무원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말이 좋아 개척정신이지 남들이 보면 미친 짓이죠. 전 연에 미쳤습니다. 미친놈이 미친 짓 해야 미친 작품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신체마비 왼손가락 절단 등 장애 극복하고 억대 매출 연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보통이 넘는다. 사비를 털어 실험용 쥐를 직접 구입해 연의 효능을 측정할 정도다. 때문에 매년 6억~7억원대 고수입을 올리는 부농이기도 하지만 빚도 많이 냈단다. 그렇지만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도전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며 “그동안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실제 그랬다. 지금처럼 되기까지는 남다른 도전정신과 성실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때 심각한 좌절을 맛보기도 했고 심지어는 세상을 등질 모진 결심도 했더랬다.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충북 제천 옥순봉 뱃사공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댐이 건설 된 지 얼마가 지난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댐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하반신 마비가 왔다. 20대 초반에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해 신체가 마비되자 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으로 하루를 벌어 먹고사는 사람에게 신체 마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을 정도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심지어는 자살 시도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목숨보다 질긴 것이 없었다.

그 후 몸을 추스른 후 보험금을 가지고 가구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인지 경험이 부족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남은 자금과 빚을 얻어 꽃집을 냈다. 가구 공장을 하며 잃어버린 돈을 생각하면 한이 맺혔다. 만회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럭저럭 꽃집운영은 잘 됐다. 배달기사와 전화받는 아가씨 급여를 주고 서도 당시 돈으로 매월 200만원씩은 남았던 것 같다.

장사가 잘되니 욕심이 났다. 사업을 확장하고 싶었다. 경기도 광주에 사시는 형님에게 돈을 빌리려 했는데 잘 안됐다. 갑자기 사는 게 허무해졌다. 술을 잔뜩 먹고 꽃집을 그날로 처분해 버린 뒤 주민등록까지 말소시켰다. 그리고 부산 자살바위를 찾아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이 들어 소주 반병을 바위 위에서 마셨다. 그런데 자꾸 지나가는 커플들이 그에게 와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게 아닌가.

‘에이 마지막이니 한번 찍어주자’ 해서 한두 번 찍어주다보니 결국엔 마음이 풀어져버렸다. 바위를 한두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죽는 건 내일 죽어도 되니까 다시 한 번 살아보자’하는 마음이 들게 됐다.

젊은 혈기로 인한 치기였을까. 그땐 돈도 귀찮고 그냥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먹여주고 재워준다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운이 좋게도 가구공장에 취직이 됐다. 가구공장을 운영했던 게 경력이 됐다. 가구공장을 다니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생활도 점점 안정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 사고가 발생했다. 가구공장에서 일을 하던 중 왼손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절단된 것이다. 그때 사고로 그는 2급 장애를 판정받았다. 지금은 상태가 호전돼 5급이 됐다. 이때의 좌절감도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나란 사람은 몸을 굴려 먹고 사는 사람인데 손가락이 잘렸으니 목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어요.”

그땐 방황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살아야 했다. 결국 부산을 떠나 시골로 갔다. 친구가 달성에서 연농장을 한다고 해 그곳에 가서 친구를 도우며 1년을 살았다. 친구가 도와주면 1000평 정도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열심히 친구의 연밭에서 일했다. 월급 대신 먹고 자는 것만 해결했다.

그런데 1년 후 친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는 친구 집에서 나와야 했다. 다행히 시골에서 젊은이가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이 있었다. 마을을 오가며 틈틈이 동네 사람들의 일을 도왔더니 그걸 어여쁘게 본 사람들이 있었다. 칠곡에 사는 '아는 형님들'이 땅 2000평을 맡겨 볼 테니 농사를 지어보라고 권했다. 그곳에 연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은퇴 후 귀농, 근면 성실함으로 돈 되는 농사를 하라 연농사를 하게 된 계기는 어느 날 남의 집에서 품앗이를 하는데 주인 할머니가 인건비로 자신에겐 300만원을 주고 1000만원의 수익을 남기는 것을 본 후부터였다. “그때 제가 ‘이거다’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할머니도 1000만원을 거뜬히 버는데 저는 젊고 힘도 있고 제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친환경농법에 끌렸다. 젊고 힘도 있었던 데다 부지런한 성격 때문에 그는 금방 마을에서 눈에 띄는 농사꾼이 돼 있었다. 마을에서 이것저것 맡기면서 청년회장과 새마을지도자, 영농후계자가 됐고 지원도 받았다. 몇 년이 지나 그는 자신이 생산해 팔아야 하는 연근에 상표를 만들어야 했다. 원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처음엔 ‘칠곡왜관연근’이란 이름을 사용했지만 나중엔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근’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연근을 파는데 하근이나 중근보단 상근이 낫지 않습니까. 허허허.” 1박2일이란 TV 프로그램에서 ‘상근이’가 인기를 끌면서 상근연근도 덩달아 수요가 올라갔다. 연근은 더 잘 팔렸고 그도 훗날 더욱 유명해졌다. 그가 연농사를 처음 시작할 땐 별도의 자금이 들지 않았다. 초기비용은 영농자금 약 800만원을 갖고 시작했다.

농사짓고 연근을 내다 팔면서 알게 됐던 각 지역의 농사 선배들이 서로 밭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땅을 따로 임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한때 농장을 한번 돌아보는 거리가 350km,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돌아봐야 할 정도였다. 지역은 경남 상주, 고성, 왜관 등에 걸쳐 있었다.

“연농사는 전망이 밝습니다. 현재 국산은 약 6%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중국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농사를 많이 해서 국내 수요를 늘리고 해외에도 연농사 기법 등을 알려서 기술수출을 하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꿈이 있다고 한다. 연 가공품 개발을 해서 연을 더 널리 보급하는 일이다. “딸과 약속을 했습니다. 제 딸은 소설가가 되기로 했구요, 저는 65세가 되기 전에 연으로 노벨상을 타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현실성 없는 일이라고 말해도 꼭 달성해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목표에 근접할 수 있도록 매진할 계획입니다.”

50+ 성공노트 자본금 영농자금 800만원. 가지고 있던 돈과 금융권 대출 등을 이용해 목돈을 마련해 시작했다. 땅 임대료는 성실하게 일한 대가로 사람들이 빌려주는 형태로 시작했기 때문에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았다.

준비기간 및 과정 친구가 운영하는 달성의 연농장에서 1년간 숙식하며 연재배 노하우를 배웠다.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벤처대학 등에서 마케팅, 농사경영 기법 등을 공부하고 9년간 전국 연밭 실태조사에 나서는 등 열정적으로 연연구에 몰입했다. 연농사꾼으로 살아온 19년이 준비과정이자 실전의 장이었다.

성공 노하우 부지런한 성격과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의지가 성공의 밑천. 비록 자기의 고향은 아니지만 농촌에서 자기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이웃의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 밝은 인사성으로 주민들의 마음과 신뢰를 얻어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값비싼 실험용 쥐를 직접 구입해 연구할 정도로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도전의식도 억대 부농이 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김은경 기자 kekisa@

50플러스  |  econovill@econovill.com  |  승인 2012.08.23  11:06:19
50플러스의 다른기사 보기

[태그]

#당당한50, #연애, #이코노믹리뷰, #재테크, #부동산, #주식, #투자, #장애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여백
여백
전문가 칼럼
동영상
PREV NEXT
여백
포토뉴스
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