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란 단어에 걸맞은 인물을 떠올렸을 때 문득 이 사람 생각이 났다. 50대에 다국적 IT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고, 지금은 자기가 만든 갤러리 형태의 예술정원 대표를 하고 있는 엄연히 현직인데 왜 그가 떠올랐을까.

아마도 그가 소재회사와 정보기술(IT) 업체의 성공을 경험한 CEO로 직장을 떠나면서 몇 년간 은퇴자로서의 생활을 해봤고 지금은 최고의 월급쟁이에서 오너로, 그동안 몸 담았던 데와 전혀 다른 분야로 나무를 가꾸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30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고 예술조경업 창업 3년차를 맞고 있는 정수진 정수조경 대표를 만나 그가 겪은 은퇴란 무엇인지, 그리고 나무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다만, 그의 정확한 나이를 밝히긴 어렵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데 공개해서 편견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는 그의 당부 때문이다. 정 대표는 “그저 열정적으로 인생 2막을 개척해나가는 은퇴자의 이야기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전했다. 월급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2007년이었으니 이를 감안해 대략 짐작해볼 따름이다.

● 다국적 IT기업 대표에서 조경사업가로 변신한 계기는.

“대학원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사해 4년간 기획조사 관련 일을 했다. 외국계 첨단 소재기업에서 영업 경험을 쌓았고 승진해 회사 대표를 맡았다. 기업 인수합병 과정에서 회사를 나온 후에는 캐나다에 본사를 둔 통신장비업체 노텔네트웍스 코리아 대표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 2006년 퇴직했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설 때가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뚜렷하게 무엇을 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는 아니어서 몇 년간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9년 전, 퇴직금으로 서울 강남 율현동에 마련한 땅(약 2600m²)에서 사업을 구상하기로 했다. 오래 활용하지 않던 땅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고민하다 “조경 디자인과 공사를 의뢰하려고 해도 참고할 만한 샘플을 볼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갤러리 형태로 샘플(견본) 정원을 만들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지인으로부터 건축가와 조경디자이너를 소개받았다. 관련 업계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3년간 준비하면서 마음을 굳혀 2012년 5월 정수조경을 창업했다. 자본금은 4억원으로 시작했다.”

● 갤러리 형태의 정원이라 하면.

“나무와 돌의 조합으로 이뤄진 30개의 거대한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 형식의 예술정원을 조성했다. 도심 한가운데서 다양하고 기이한 형태로 곡선미를 갖춘 소나무의 생명력과 육중한 돌의 조형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 보면 된다. 여기에 음향시스템과 조명까지 더해지면 거대한 화폭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간예술을 다루는 관점에서 접근해 나무, 꽃 등 조경이란 하드웨어에 조명과 음악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조화시켜 정원을 만드는 개념은 정수조경만의 차별성이다. 고객은 이곳 아트정원에서 작품을 마음껏 감상하고 조경 의뢰를 할 수 있고, 우리 회사는 이에 기반해 고객의 정원을 꾸미는 일을 한다.”

● 왜 하필이면 소나무인가.

“평소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을 즐기는데 출장이나 여행으로 세계를 돌아다녀 보니 한국의 소나무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나라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었고 예술성을 가미했을 때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조경학을 배워야겠다는 절실함이 생겼다. 그래서 천안연암대 조경과에 진학했다. 소나무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어떤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할지 구상했다. 소나무의 매력에 빠졌다고 꼭 소나무만 다루는 건 아니다. 정원 조성 시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 다채로운 나무들과 돌, 조각, 꽃의 조화로운 어우러짐을 꾀한다.”

 

● 그동안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했나.

“대형 보험회사 회장 저택의 정원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회장님이 정수조경의 정원을 둘러보고 고른 소나무 작품 ‘비상’을 중심으로 꽃을 디자인해 서양풍의 정원 분위기로 꾸몄다. 야외 테이블을 설치해 식사도 할 수 있고 작은 올레길도 만들어 산책도 가능하게 했다. 전반적으로 집안의 공간을 터서 소통이 잘 되도록 하는 데 신경 썼다. 리모델링한 정원에 대한 회장님의 만족도가 높아 이 회사의 연수원 조경 프로젝트도 담당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작업하기도 했다. 내가 하는 역할은 콘셉트 디자이너로, 말 그대로 정원 전체의 콘셉트를 정해 기획하는 일을 한다. 내부 직원을 고용한 그래픽 디자인을 제외하고 가든디자인과 조명 등은 국내외 전문가들에게 외주(아웃소싱)를 준다. 그래픽 디자인은 관련 학과를 전공한 딸이 맡아 하고 있다.”

● 추구하는 정원 콘셉트는 무엇인가.

“내가 추구하는 정원은 네 가지 콘셉트를 지향한다. 관리가 쉬어야 하고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나라의 좋은 소재를 사용하면서 서양풍의 현대적인 감각을 갖춰야 한다. 특히 일반 단독주택 정원 작업을 진행해 보니, 우리나라 주택의 경우 아웃도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형성돼 있지 않더라. 아쉬웠다. 아름다운 나무를 보면서 정서를 일깨우는 동시에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기는 문화 조성에 기여하고자 한다. 비움의 공간을 설정하고 쓸모없는 공간을 의미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게 정원을 만드는 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 갤러리 정원 조성과 사업에 들어간 비용이 상당할 것 같다.

“작품을 만들고 나무를 관리하는 데 큰 비용이 투입되는 건 사실이다. 대형 나무가 많이 비싸기 때문에 공사비를 좌우하게 된다. 대지 495m²(약 150평) 기준으로 좋은 품질의 나무 3그루를 사용했을 때 대략 5000만원의 공사대금이 투입된다. 대형 주택의 공사비는 억대에 달한다. 운 좋게도 작년에 큰 규모의 공사를 몇 건 진행해 재투자 여력이 생겼다.”

●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것 같다. 보통 은퇴하면 경제적 압박을 심하게 받는다. 또 뭘 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은퇴 공백기가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생활비를 계속 충당해야 했고 내 일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에 돈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마냥 손 놓고 쉴 수만은 없어 간간이 사모펀드 관련 일을 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과 인생 2막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다. 그럴 때면 한겨울에도 새벽길을 걸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고 긍정 마인드를 채우는 연습을 하며 견뎌냈다.”

● 조경사업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

“전직 CEO가 갑자기 농부 스타일로 일을 한다니까 처음엔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나 역시 다른 많은 은퇴자들이 제2의 인생을 펼치는 데 있어 그렇듯 가족이 인생의 어려운 난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목표를 정해 다시 열정적으로 일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고 식구들은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하나의 회사를 세우고 또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밤낮 없이 연구하는 내 모습에 지금은 모두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딸이 곁에서 일을 도와주니 더욱 든든하다.”

● 나무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일반 예술작품이나 미술품은 정물에 불과하지만, 나무는 각도와 조도 등에 따라 형상이 달라지는 입체적인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 향후 목표와 포부가 궁금하다.

“나는 여전히 혈기왕성하다. 좋은 나무 작품을 많이 창작하고 더불어 가족이 행복한 공간을 만드는 게 목표다. 우리나라 소나무와 돌을 중심으로 서양풍의 정원을 조성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다.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를 통해 이 작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다. 정원의 한류를 주도하고 싶다.”

● 비슷한 또래에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절대로 늦었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늘 마음가짐을 ‘늦었다’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가져야 한다. 인생 100세 시대다. 앞으로는 내 나이 즈음에 새로운 일을 시작해 성공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거다. 다만, 인생 2막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업관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하다. 완벽하게 준비됐을 때가 사업 스타트 시점이다.”

 

조경업에 대한 정수진 대표의 조언

정부 및 민간 입찰을 기반으로 하는 조경업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건설업 등록을 해야 하고 조경기사 자격증도 있어야 한다. 정 대표가 운영하는 조경업의 경우 전문건설업등록은 돼 있으나 입찰로 물량을 따내는 사업방식이 아니므로 이런 조건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정수조경의 1차 고객은 기업과 일반 가정집이다. 사업 초기엔 직장생활 시절 쌓았던 인맥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는 예술조경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퇴직자들에게 “토지는 농사짓기 위한 용도보다는 작아도 좋으나 자본력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며, “창조적 도전 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관련 공부를 전문적으로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 대표는 자본금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자에게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자금 확보”라며 “조경업 특성상 단기간에 돈을 벌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3∼4년 동안 참고 견딜 수 있는 자금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