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도 측정될 수 있다. 세상 모든 이를 위한 선의도 숫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글로벌 자본가가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세계적인 뉴스감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선’이란 평가를 내리면서 그의 재산 규모로 눈을 돌린다.

우리의 친구가 갑자기 가진 것 다 내놓겠다고 한다면? 헛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한 잔 더 하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전 재산 기부 운운하면 “취했다” 소릴 듣는다. 규모의 경제학은 정말이지 세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아름다운 자선활동’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연말 우린 한 젊은 자본가가 인류와 자기 딸을 위해 통 큰 결단을 내렸다는 걸 알고 있다.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가 회사 지분 99%를 단계적으로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을.

저커버그는 ‘아름다운’ 명분을 내세웠다. 갓 태어난 딸 맥시마가 더 나은 세상에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페이스북 시가는 450억달러(약 52조원)에 육박한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었다면 이토록 전 지구적인 관심을 받기나 했을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규모의 자선’이라고 해서 항상 박수 받는 건 아니다. 거액만 들인다고 완전무결한 인류애를 실천할 순 없단 이야기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올 경우 자본가들은 진정성을 몰라준다고 세상을 탓하기도 한다. 베풀고 욕먹은 것이니 화가 날 법도 하다.

저커버그도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가 인류를 위해 자선활동을 펼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런데 항상 박수를 받지는 못했다. 적지 않은 돈을 투입하고 실패의 쓴맛을 보기도 했다. 각각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2010년 9월로 기억을 되감아보자. 그는 교육개혁 실험에 1000억원 이상을 쾌척하기로 했다. 빈민가로 알려진 미국 뉴어크 지역 몇몇 학교를 명문고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자는 프로젝트에 돈을 댔다. 코리 부커 전 뉴어크 시장의 제안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다.

훗날 이 프로젝트 실상을 까발린 책이 등장했다. 탐사 저널리스트 데일 루사코프의 책 <포상>(2015)이 그것이다. 저커버그의 교육개혁 실험이 별다른 성과 없이 ‘돈 낭비’에 그치고 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거액을 쏟아 붓고 무능한 교사만 자르면 교육이 좋아질 걸로 착각하면 큰 오산이다.” 루사코프는 저커버그의 ‘자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원받은 학교 대다수에서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지기도 했다. 그 외 다른 교육 효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교육개혁의 핵심은 냉혹한 성과주의 도입이었다. 높은 교육 성취도를 이끌어낸 교사에게는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 경우는 해고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실제로 기부금 절반이 유능하다고 소문난 교사를 불러들이고 성과급을 주는 데 사용됐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통용되는 경쟁 원칙을 학교에 도입하면 자연스럽게 성과가 날 것이라는 발상이다. 냉혹한 성과주의를 적용해 교사를 압박하면 효율성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에 기반을 둔다. 그릇된 접근이란 건 결과가 말해준다. 경쟁 만능주의가 사실은 성과를 내는 데 불리하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경쟁은 효율성을 떨어뜨릴 만큼의 높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스트레스가 높은 경쟁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나은 성과는커녕 그저 실패하지 않는 데에만 급급하다.” 미국 교육 심리학자 알피 콘이 저서 <경쟁에 반대한다>를 통해 주장한 내용이다. ‘실패하지 않는 데 급급한’ 구성원들은 전체 시스템의 실패를 유발했다.

저커버그와 부커가 생각한 교육개혁은 빈민가 학교가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전제에 기반을 둔다. 그들은 경쟁의 효율성을 신봉했지만 결과는 그것의 비효율성을 노출하는 데 그쳤다. 교육의 효과를 성적 향상에서만 찾는 것은 분명 반교육적이다. 이들은 성적 향상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자본과 성과주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두 마리 토끼 잡기’의 어려움

두 번째 실패는 비교적 최근 일이다. 올해 2월 8일 인도통신규제당국(TRAI)이 저커버그의 ‘국제 자선활동’에 태클을 걸었다. 페이스북 주도 무료 인터넷 보급 사업인 프리베이직스(Free Basics) 서비스를 인도에서 허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난해 잠정 중단 결정에 이어 정식 불허 판단을 내린 것이다.

페이스북이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일부 서비스에만 접속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지역별로 다르긴 하지만 대개 페이스북 관련 서비스에만 접속할 수 있었다. TRAI는 일부 서비스만 인터넷 접근을 무료로 허용하는 것은 망 중립성(Net Neutrality) 원칙에 위배된다고 했다.

서비스가 잠정 중단됐을 당시 저커버그는 억울해했다. 인도의 매체에 기고를 통해 인도인들을 설득하려고도 했다. “만약 사람들이 인터넷 접속을 위해 요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면 전혀 접속할 수 없는 것보다는 일부 서비스라도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언제나 더 낫다.”

저커버그는 이 프로젝트를 분명히 자선활동으로 여기고 돈을 풀었다. 지구에서 인터넷 사각지대를 몰아내자는 선한 의도를 항상 강조했다. 업계 시각은 다르다. 저커버그가 40억명에 달하는 인터넷 수혜를 받지 못한 이들을 고객으로 선점해 돈을 벌기 위해 이런 프로젝트를 벌인다고 의심한다. 저개발국을 자본 증식을 위한 노다지로 보고 큰돈을 ‘투자’했다는 시각이다.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갑자기 저커버그가 TRAI의 요구대로 무료 인터넷으로 접속 가능한 서비스 영역을 넓히려 한다면? 서비스 통제로 수익 극대화를 이룰 순 없겠지만 진정성은 확인시켜줄 수 있겠다. 무료 인터넷 보급 프로젝트가 선의를 가장한 사익 추구에 불과하다는 의혹을 저커버그가 떨쳐낼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다.

자본가의 인류애는 왜 실패로 끝나나

자본가는 자신을 자본주의 시대의 영웅으로 여기곤 한다. 시대가 한 인간을 감정구조를 통제한 결과다. 자본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를 실현해 명예까지 얻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규모의 자선’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이들이 가진 자본은 인류애를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로 기능한다. ‘거액 쾌척’은 대개 뉴스거리가 된다. 쏟아지는 보도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신화는 확대 재생산한다. 세계 곳곳에서 신화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진다. 다만 저커버그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규모의 자선은 종종 실패에 직면한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비즈니스 세계의 원칙대로 진심을 표현하려다 그 원칙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으려면 결국 그들을 그 자리에 오르게 해준 현실원칙과 잠시라도 결별해야 한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잘나가는 CEO에겐 쉽지 않은 과제다.

저커버그가 어려운 과제를 풀어내고 자본가의 역할을 재규정하는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직까지 불평등 시대 희생자를 자본가는 효과적으로 구해내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소득 격차는 날로 커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시대의 암흑’을 거둬내기 위해 자본가의 선의에 의존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