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 근저당이 뭡니까. 지금도 그 뜻을 잘 모르겠는데, 그땐 머리 속이 하얘지더라구요.”

사업하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몰려 파산하는 사례는 주변에 흔하다. 남미 지역의 교포와 섬유원단 무역중개사업을 하던 박준욱씨(가명, 69세)는 지난 2007년 은행의 난데없는 통보를 받고 거래하던 모 은행 지점으로 내달렸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몇 개월 전 이미 미국계 은행들은 남미지역 엑스포저(위험대출)를 줄이기 시작했다. 오랜 거래처인 남미 교포는 미국계 은행의 대출회수로 부도를 내고 말았다. 20만 달러 무역보증을 섰던 무역보험공사가 이를 통보하자, 모 은행 직원은 L/C(수출신용장) 개설 약정서를 박 씨에게 들이밀었다.

“직원이 `여기 포괄 근저당을 제공한다고 서명잖아요. 사모님도 연대보증에 서명했고요`라고 하는 거예요. 포괄 근저당이 뭔지도 모르는데, 제 서명이 있더라고요. 기가 막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미래에 발생하는 채권의 일정 한도까지 담보를 설정하는 포괄 근저당(지금은 없어졌다). 뜻조차 몰랐던 이 조항에 서명한 탓에 졸지에 부도를 맞았다.

“매출채권이 10억원을 넘었을 텐데, 부도 바람에 회수는 물 건너갔죠. 당시 제 빚은 5억원이 넘었습니다. 그때 금융을 조금 알았더라면 부도를 피할 방법을 찾았을 텐데..”

추가 대출을 일으켜 은행 대출을 일단 갚고 고비를 넘기거나, 분식한 후 회사를 팔라는 위험한 조언도 있었다. “본래 꼼꼼한 성격이라 자신했기에, `포괄 근저당`이라는 걸 체크 못한 저 자신을 탓했죠. 나쁜 방법을 쓰면서까지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무역 오퍼상을 했던 박씨는 사치를 몰랐다. 한때 섬유원단 무역으로 연간 매출 1500만불까지 올렸던 그는 집 한 채만 가진 채 현금을 모아두었다. 제조공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공장 부지를 살 궁리 뿐이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모든 게 날아갔다.

▲ 해외 바이어의 부도로 연쇄 부도를 맞은 박준욱(뒷모습 보이는 이)씨가 파산절차를 통해 자신의 채무를 해결한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박 씨는 이 때 지인의 소개로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라는 시민단체를 찾았다. 빚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상담해 주는 이 단체는 박 씨의 개인채무 정리 방법을 조언했다. 개인 회사였기 때문에 별도의 기업파산 절차는 필요치 않았다. 그는 상담 처음부터 자신의 성장과정, 가족문제, 재산상황 등 전부 털어놓고 간절히 도움을 청했다.

그를 상담했던 시민단체 관계자는 “모든 상황을 다 털어놓고 시작한 것이 매우 중요했다”며 “많은 경우 채무자들은 한 두 가지 채무사실을 숨기거나 까먹고 있다가, 개인회생 또는 파산절차 중에 발견된 우발채무로 또 다른 애로를 겪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씨는 개인파산 신청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바람에 일단 개인회생 신청으로 가닥을 잡았다. “집으로 압류통보가 온다든지, 추심명령이 오면 가족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 같았고, 저 자신도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힐까봐 겁이 났죠.” 더욱이 운 좋게 사업 재기했던 과거의 기억이 생생해, 파산 신청으로 재기의 꿈을 접는 게 싫었던 것.

먼저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추심금지명령을 받아냈지만 이후 개인회생 작업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포괄 근저당이라는 것이 무담보 신용채무인지, 담보채무인지가 아주 애매했다”고 되짚었다. 개인회생을 신청하려면 무담보 신용채무 5억원 이하, 담보채무 10억원 이하여야 하는데 박 씨의 경우 포괄 근저당이 잡힌 채무를 무담보 신용채무로 간주할 경우 5억원이 넘었던 것.

개인회생 진행이 막히자, 개인파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시 채권 추심 압박을 걱정했지만 다행이었다. 은행 등의 채무가 오랜 시간을 경과한 뒤라 연락이 없었다. 개인 채권자들은 부도 사실을 알고 포기하고 있었다.

박씨는 개인파산 신청 후 큰 애로 없이 6개월여만에 파산선고, 면책 결정을 잇따라 받았다. 회사 부도후 1년 6개월만에 채무 전액을 탕감 받은 것이다. 면책은 채무가 사라진 게 아니라, 상환 책임을 면해주는 것. 그러나 면책후 8년이 지난 지금, 박 씨는 경제활동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혀 있을 거 같아 은행을 가지 못하고 있죠. 신용카드도 없고, 사업 재기를 위해 은행 계좌 개설을 문의할 의사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박 씨는 이후 전혀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위 명의로 회사를 설립, 과거 알던 해외바이어와 일을 추진했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과거 개인 채권자를 찾아갔다. 4300만원 정도 원료가격을 지불하지 못했던 한 채권자에겐 500만원을 내밀었다.

“그 채권자는 `사업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 포기하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왔냐`며 놀라더군요. 그 분에게 돈을 내밀고 용서를 구했죠. 다른 채권자들도 찾아가 조금씩 갚았습니다” 면책결정을 받았지만, 마음은 늘 죄송했다는 박 씨다.

모든 걸 밝히고 상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 재무설계 컨설팅을 해주는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의 김희철 대표는 “상담은 빚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대부분 과다 채무자들은 오랜 채무와 추심 압박으로 자살 충동까지 겪기도 한다. 판단능력도 떨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담하는 동안 고통스런 상황과 속내 심정을 털어놓게 되면, 마음의 위로는 물론,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사례를 조언 받으며 해결책을 찾는다.

누구나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대체로 저소득층, 소외 계층은 솔직하게 털어놓지만, 대기업 임직원, 중견사업자, 공무원 등 중상위층은 자금만 조금 있으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며 어이없을 많큼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상담받을 곳은 어떤 곳이 있나. 그리고 비용은.

채무자들이 올바른 상담사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중에는 개인회생 및 파산을 전문으로 한다며, 과다한 비용을 요구하는 브로커(?) 때문에 이중의 피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있다.

채무 문제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시민단체나 사회적 기업들은 신용사회만들기시민연합, 민생연대,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 그리고 에듀머니, 포도재무설계,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 등이 대표적이다. 또 신용회복위원회는 채권금융기관들의 대리인격으로 지원한다.

김희철 대표가 이끌고 있는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의 경우 자격증을 가진 신용상담사가 부채를 중심으로 재무설계를 컨설팅해주는 곳이다.

자격 있는 상담사의 상담을 받을 경우 일정한 수수료를 내야한다. 시민단체들은 수수료가 아닌 기부나 후원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큰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회생과 파산절차를 진행하면 실무적인 비용이 따로 든다. 채권자 숫자에 따라 다르지만 채권자가 10명일 경우 인지대, 송달료, 부채증명서 발급비용, 우편료 등 30만원 가량 발생한다.

또 법률 업무에 따른 변호사 비용도 채무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다만, 서울시복지재단, 법률구조공단을 통하면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개인 회생에는 변호사 비용이 대개 150만~200만원 가량 든다. 시민단체 중에는 무료 변호사를 소개해주기도 한다.

신용등급 회복은 중요하지 않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의 김희철 대표는 “신용등급을 올리는데 집착할 필요는 없다”며 “신용등급은 빚을 질 때 필요한 것인 만큼, 신용등급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일상 생활에서도 대출을 받지 않는다면 신용등급은 큰 의미가 없다. 은행 예금, 적금을 가입할 때, 신용등급을 따지지 않는다. 신용카드도 체크카드를 이용하면 된다.

김 대표는“신용등급은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을 나타내는 점수가 아니고, 금융을 제공하는 금융기관 외에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고 주장한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워크아웃제도 적극 활용해야

채권금융기관의 대리인인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한 개인 워크아웃제도를 신청하는 사람들도 요즘에는 많다.

부채조정 전문가인 류기훈 씨는 "개인 워크아웃은 여러 금융기관에 3개월 이상 원리금을 연체한 채무자가 이자를 탕감 받고, 최장 10년에 걸쳐 장기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라며 "성실한 변제자에게는 추가로 원금을 탕감해주거나 채권이 매각된 경우 이중감면도 해준다"고 귀띔했다. 생계비 규모의 소액신용대출도 지원한다.

또 신복위의 프리 워크아웃제도는 연체기간이 3개월 미만일 경우 금융기관의 연체이자율에 비해 절반정도의 이자를 물며 장기분할 상환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기 연체자를 위한 제도다.

개인워크아웃, 개인회생, 파산 등은 말 그대로 신용회복, 회생을 도와주는 제도인 만큼, 이를 신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기피하는 순간 해결책은 멀어진다. 이를 모른 채 대출금과 이자를 돌려막는데 급급하다 보면, 개인과 가정만 파괴될 뿐이다.

김 대표는 “고금리, 다중 채무에 몰려 매일매일 돈을 돌려막도록 강요하는 게 사회정의는 아니다”며 “금융 질서라는 명분하에 악마의 맷돌에 삶이 으깨져나가도록 방치하는 게 과연 자본주의의 질서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볼만 하다”고 주장한다.

개인회생 및 파산제도를 사법부가 제공하는 `사회안전망` 대책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빚으로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은 제보나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고민을 나누며 좋은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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