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 116.8×91㎝(each) Acrylic on Canvas, 2017

 

“논에 갔다 온 관전이 아버지하고 기웅이 아버지하고 만나 서로 대추나무 아래서 의논하더니 관전이 동생관철이란 놈 기웅이 동생 기중이란 놈 이 두 놈을 끌고가서 미제 방죽 재실 빈집에 집어넣고 돌아와 버렸다/하룻밤 지난 뒤 아침에 가보니 그놈들 둘이 얼싸안고 밤새도록 귀신 나올까 도깨비 올까 서로 엉켜 식은 검불 위 쓰러져 곯아 떨어져 있었다/됐다! 이놈들 다시는 안 싸울 터!”<고은 만인보③, 아이들 싸움, 창작과비평사 刊>

 

때론 현실감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삶의 의미라는 통로의 그 깊은 세계에로의 들어감이다. 검게 보일 뿐 허공이 아니라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공간 안에 있는 환경을 간소화한 어떤 작위적 자국의 희미한 흔적마저 사라져 있는, 일체를 버려버리고 포용성 자체를 받아들인 화면이다. 반복수행을 통해 무의식 세계서 건져 올린 무아지경은 곧 유현(幽玄)의 세계다.

우선 빨강색만 칠해놓고 파란색도 넣고 노란색으로 덮고 그렇게 색이 겹치면서 검게 된다. 그러고도 검은색 등을 되풀이해서 칠한다. 마치 하루 내내 바닥에 캔버스를 펴놓고 비슷한 색을 칠하는 추상표현주의 선구자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이나 캔버스 위에 물감을 쏟아 부으며 ‘액션 페인팅’을 했던 잭슨 폴락처럼.

 

▲ 65.1×50㎝(each)

 

이 무의식적 행위가 탈탈 털어버리면 무지 허할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순환의 대우주 속 ‘나’라는 한 점은 티끌이런가. 뉴질랜드에서 화업 했던 시절의 작가노트에서 블랙화면의 사유공간을 발견했다.

“요즘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뒤뜰에 있는 두 그루의 큰 야자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응시하며 그날의 날씨를 살피곤 한다. 또 저녁 무렵에 바닷가를 걸으며 다시 하늘을 보며 ‘How Are You?’라고 인사한다. 허공을 맴도는 소리, 그러나 그것은 빈 공간이 아니다.

흐르는 물, 치솟은 산,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들은 부단히 음기와 양기를 부딪치면서 기운을 전개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이 삼라만상을 있도록 한다. 이처럼 내 주변 환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징후를 헤아리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 45.5×27.3㎝(each)

 

◇소멸의 형상

광장에서 본 사람들의 외침과 몸짓, 사랑을 잃어버린 사내가 토해내는 처절한 이별노래 같은 것들이 스케치가 되고 형상들이 모아져 어떤 기호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그런 순간들이 지나가듯 캘리그라피도 빠른 속도로 지나갈, 뿐이다.

그리다가 지우고 수차례 버리기를 반복하다 맥이 풀린 다음 ‘에라, 모르겠다’하고 하다가보니, 에너지를 고갈시킨 다음에 만들어졌다. 하나가 완성되면 그 프로세스를 잃어버리게 되니까 간단치는 않다.

그렇게 나온 형상을 소멸의 얘기로 풀어낸 것이다. 먼 이국땅에서 양규준(GYU JOON YANG) 작가가 깨알같이 써 놓았던 작가메모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남태평양 섬 북단의 외부와 단절된 숲 속은 고요하다. 이곳은 앙리 루소의 원시림인가? 폴 고갱이 이상적인 삶을 꿈꾸며 찾았던 타이티 섬 풍경이 이러 했을까? 이따금씩 산비둘기의 빈 날갯짓이 숲의 정적을 깨뜨린다. 여기가 어디인가….

시간과 공간의 벽은 이미 허물어지고 여러 생각들이 뒤범벅이 되어 간다.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사라지는 기억들의 잔해에 문득 알 수 없는 슬픔이 왈칵 몰려온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어슴푸레 어둠을 뚫고 숲을 빠져나올 때 나는 느꼈다. 자연의 생명감으로 가득한 신비로운 숲을 가로지르고 있는 나의 작은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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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