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40.9㎝

 

“아, 저 먹이! 저 맛있는 꽃! 굶주림에 지친 나를 살려준 꽃, 헛구역질의 꽃향기도 기억난다. 아, 저 황홀한 먹이! 한국전쟁의 마르고 긴 낮은 몇 달씩 지치고 배가 고팠다. 시야가 노랗던 초등학교 6학년, 뙤약볕이 어지럽고 무섭게 더워 방공호 땅굴 속의 흙벽을 긁으며 작은 진흙덩어리 몇 개씩 삼키고 흙 묻은 입에 아카시아 꽃송이들 몇 송이째 씹어 먹고 또 먹던 그 여름, 저 흰 향기의 밥.”<마종기 詩, 1950년 아카시아 꽃, 문학과 지성사 刊>

 

강물에 초록 잎들이 닿을 듯 말 듯 며칠 사이 강둑수양버들이 부쩍 자랐다. 재잘거리듯 싹이 돋아 바둑알처럼 연두빛깔로 장식한 늘어진 가지를 본 것이 엊그제만 같았다. 미성(美聲)의 테너가 부르는 애절한 구애의 아리아에 감명 받은 듯 잎들은 가늘게 흔들리며 음색이 깊어갈 때마다 물 위에 그림자들을 드리워 다채로운 물감을 뿌리듯 영상을 만들어 갔다.

시간의 흐름은 색깔도 깊게 물들인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바람이 이는지 혹은 잎들이 재잘거리며 수다를 떠는지, 강물과 나뭇잎은 무어라 속삭이며 같이 출렁거리는 것이었다. 그가 나직이 독백하는 것이 들렸다. ‘흐르는 것은 또한 흔들리는 것은 무엇인가. 물과 물은 서로를 비비고 다독이며 흘러가네. 강물은 소리 내어 오오 햇빛에 반짝이는 찬란한 수면의 향연을 선사하누나. 서로를 껴안아 온기를 나누는구나. 봄은 흐르는데 무엇이 다시 내게 오려는가.’

 

▲ 33.3×24.2㎝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이 연주한 베토벤(Beethoven) 소나타8번 비창 1악장(Sonata No.8 Pathetique-1st movement)선율이 잠깐의 빗줄기 꽃잎에 매달린 물방울을 조심스레 건드린다. 꽃잎은 투명한 은빛방울의 반지를 가벼이 숨기고 방울꽃은 하느작거린다. 리듬은 봄밤 공기를 유영한다. 꿈을 꾸듯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먹이듯 강가에 서서 저 건너 양떼를 바라보며 라일락 꽃가지를 볼에 문지르며 때 이른 별빛을 곁눈질하는 퉁명한 눈빛이여!

작은 창 너머 새순의 꽃, 그래서 너를 닮고 싶은 것이라던 노래가 들려온다. 부끄럽지만 봄은, 소리 없이 온다던 순박했던 시절의 가슴 콩닥거리던 설렘이어라. 꽃도, 살얼음이 풀린 강물이 속살을 드러내며 흐르는 것도, 잔바람에 나부끼는 연분홍치마 고혹의 나풀거림도 모두 고요에 피어나는 뜨거움이라 누군가 말했다. 세월 지나서야 깨닫게 되다니, 어디선가 짧은 파장의 소리가 지나갔다.

 

▲ 자연으로부터, 40.9×53㎝ oil on canvas, 2016

 

기억나니? 이 바람-결. 긴 머릿결에서 아카시아 꽃냄새가 나.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무슨 의민가 한참을 바라보던 그때 불어오던 바람. 우리는 닮음이야 했던 언약이 미묘하게 쓸쓸함으로 떠오르는, 봄 봄밤인데….

“밤이었구요 공중에서 흐르는 것들은 아팠는데요 쓸쓸함을 붙잡고 한세상 흐르기로는 아무려나 흐를 수 없음을 이겨내려구요/고운 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빛이 저 불빛을 상하게 하네요 당신이 불쌍해 이 命을 다하면 어떻게 하려구요 (중략) 밤이었구요 흐르는 것의 몸이 흐르지 못한 마음을 흘러 저 燈이 나그네 하나쯤 거느릴 수 있으려면 아무려나 당신 마음의 나그네가 내 마음의 나그네를 어디 먼빛으로나마 바래줄 수 있으려구요 밤이었구요”<허수경 詩, 연등 아래, 문학과 지성사 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