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ndscape, 90×160㎝ stone powder, korean paper, 2017

 

“나는 그날 오후 이후 이때까지 설악이 그처럼 낮아지고 아름다운 적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해가 지고도 한참을 설광 때문에 새벽 같았다. 발간 등불과 후레쉬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마을 사진리는 그제서야 사람 사는 마을이 되었다. 아흐레 동안 산이 눈 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날 내다본 동해는 무슨 일인지 물 속에 다니는 고기 소리가 날 듯이 말게 개인 하늘 아래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눈도 한 송이 쌓이지 않고, 그만으로 흐르고 있었다.”<고형렬 詩, 사진리 大雪, 창작과비평사 刊>

 

먼발치 적막이 흐르는가. 호수 물결 반짝이네. 은빛구슬이 물위에 구르는가하여 서둘러 호숫가 이르니 후후 물오리 한 쌍이 찰싹 달라붙어 한 몸이듯 물길을 만들어 막 지나간 흔들림, 여운이었어라. 풀숲에 앉은 새 한 마리가 그 광경을 목도하며 무엇이 그리 비위가 상했던지 후드득 있는 힘껏 날개를 펴 허공으로 솟구쳤다.

적막이 감도는 둑길에 서서 저기 미묘하게 움직임이 있는 살아 살아있음의 물결을 무심히 바라보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지을 뻔, 홀로 실성한 듯 웃어 재꼈다. 새는 어느새 흔적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공허한 오후의 하늘에 나란히 줄지어 나들이 가듯 새털구름만 푸른 산을 넘어 흘렀다.

그러다 아련히 시선을 당기는 정분의 신표(信標)처럼 낮달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은은히 드러나는 신비가 겹겹의 능선과 공간깊이 스민 블루에 내려앉는다. 오오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진정 바라오니 처음 느꼈던 본심의 가장자리로 와 비춰다오!

 

▲ 60×100㎝, 2017

 

계절은 바람과 흙 내음, 풀잎의 노래를 보듬으며 한 걸음씩 그렇게 나아간다. 여름에서 겨울로 또 봄으로…. 눈 내린 산. 멀리서 보면 나뭇잎 갈색 느낌이 다가오고 뒤쪽으로 공기의 흐름이 산 모습을 더욱 짙푸름으로 보이게 했다. 거기 잔설이 남아 드러나는 능선. 겹겹 날카로움으로 버티고 서 있는 그 산허리에 어느 유난히 바람 한 점 없는 저녁 솜사탕 같은 눈발이 천천히 낙하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여명이 저 먼먼 산을 비추며 조금씩 세상의 아침을 열 때 능선은 그 예리함을 누그린 채 평화롭고도 조금은 우울한 시편(詩篇)을 낭독하며 세월의 매듭을 드러냈다. “공기의 기운이 코끝이  찡하도록 차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창밖 풍경은 옅은 잿빛 구름이 내려앉아 차분하게 느껴진다. 멀리 보이는 대관령 산자락의 파르스름한 색감은 왠지 아련한 느낌을 준다. 저 산 너머의 세상은…. 사람이 자연보다 작다. 그것에 순응하는 생의 겸허가 나의 그림에 스며있기를.”

 

▲ 100×140㎝, 2016

◇꽃과 물빛의 마음

연꽃이 공중에 떠 향기 사방에 흐른다. ‘꽃은 피고 꽃잎 춤추네’라고 어디선가 나직한 노래가 들려왔다. 낙화(洛花)의 슬픔이 물과 섞이면 저토록 자유로워지는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가, 꿈꾸듯 깊은 잠에 빠진 저 귀퉁이 오오 ‘나’를 빼닮은 바윗돌이여. “꽃이 가지고 있는 형태나 느낌에 치중했다기보다 꽃을 선(線)으로만 표현하여 배경이 비쳐 나와 주변풍경과 하나 되는 느낌을 주려했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늘 다르게 변화하는 바다와 사람의 감성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던 날, 그렸다.”

 

▲ 폭염과 국지성 비가 잦은 일기예보가 계속 되던 날이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 대숲 그늘에서 포즈를 취한 한국화가 하연수.

 

[인터뷰]내 작업 심상으로 스미는 강릉의 풍경

“평소 서울서 강릉을 오가며 순간순간 포착되었던 것들을 기억에 남겨 그것을 조합할 때도 있고 그 장소에서 스케치하여 작업에 옮기는 등 다양한 조형방법으로 표현하려합니다. 대부분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저 역시 이런 과정들이 ‘Landscape’연작에 형상화 됩니다.

종종 주변에서 내 작업을 보고 좀 심심하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아마도 소소한 것들을 하나씩 거두어 내고난 후 남는 것들이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서울 삼청동 한 카페서 만난 하연수 작가는 자신의 회화세계에 대한 흐름을 조용하게 풀이해 주었다.

작가로서의 강릉생활에 대한 감응을 물어보았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면서 살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은 점입니다. 이를테면 강릉의 풍경들과 땅의 기운 그리고  신선한 공기 등이  조용히 내 곁에 자리 잡고 작업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조금씩 드넓게 만들어 주고 있지요. 이들을  오롯이 심상으로 녹여내고 스미도록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늘 함께하기 때문에  맘에 드는 작업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하연수(HA YEON SOO)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국립 강릉원주대학교 예술체육대학 미술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2년 덕원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으로 가나인사아트센터, 가나아트스페이스 등에서 개인전을 22회 가졌다. 작품소장처로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비핸즈, 일산병원 등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하늘을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높다란 하늘일 땐 불현 듯 맑고 푸른 바다를  보러갑니다. 조용히 혼자 앉아 바다를 마주하고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놓지요. 그렇게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날은 소리 없이 이는 물결의 움직임이 때론 무섭기도 하고  위협적일 때도 있습니다.

자연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인간의 존재란 한 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한 명상의 평안함속에서 쉼 없이 의식의 지평을 열어가며 ‘참 나의 모습’을 갈구하는 자아를 만나기도 합니다. 좀 거창할지도 모르겠지만 구도자의 수행(修行)처럼,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글=권동철/경제월간 인사이트코리아(Insight Korea)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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