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임관호 기자]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경제용어 같기도 하고 심리학적 용어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용어는 생물학 개념이기도 하고 사회학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처음 만들어낸 학자는 미국의 생물학과 교수인 가렛하딘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뭐든 공짜라고 하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혜택을 보면 된다는 생각을 지적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영역에 속하는 지하자원, 초원, 공기, 호수, 물 등은 국가가 관여하여 관리를 하거나 이해당사자가 모여 일정한 합의를 통해 이용권을 제한하는 제도를 형성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요즈음 서해안에 쭈꾸미가 씨가 마르고 한강에 물고기가 씨가 마르던 말든 마구 잡아서 해양과 강물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결국은 물고기 한마리 살수 없는 바다와 강이 되어버리면 결국은 물고기 씨를 마르게 했던 한사람은 큰 이익을 보겠지만 결국은 그도 망하게 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지금 저희가 고통받고 있는 미세먼지도 이런 비뚤어진 행동에서 비롯됐습니다. 공기야 어떻든 말든 내 나라 공장이 더 중요하고, 내가 쓰는 차의 매연이 어떻든 말든 당장 내차가 중요하고 미래 세대야 어떻든 말든 화력발전을 지어서 개발이익과 에너지 이익을 챙겨야 하고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이런 공유지의 비극은 왜 생길까요.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이용쿼터를 남은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깔려있으면 결국은 공유지의 비극이 생기는 겁니다. 나는 잘 지키는데 다른 사람들도 잘지킬까로 시작하는 의심에서 공유지의 비극이 시작되는 겁니다.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수 없는 시간에 열심히 고기를 마구 잡게 되겠죠. 그리고 자신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위선으로 가장하겠죠. 소문이 퍼지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이렇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이 합의해서 만들어놓은 규칙을 깨게 됩니다. 결국은 모두가 불행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지키는 만큼 남들도 잘 지킬것이라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사회적 수준, 민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반목과 질시가 결국은 조직과 국가, 그리고 환경을 망치는 제일 중요 요소입니다. 저희가 국회의원들을 불신하면서 그들이 입안하고 내놓는 법안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비를 펑펑쓰는 국회의원들이 세금을 늘려야 한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바탕에 짙은 불신이 깔려있어서 그 의원의 주장이 씨도 먹히지 않게됩니다. 복지라는 것. 그것도 특히 국가차원의 복지, 당연히 세금수입이 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국민들이 기꺼이 많은 세금을 내고 싶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위정자를 비롯한 정부관리, 정치인부터 이런 불신을 깰수 있도록 뼈를 깎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합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이런 공유지의 비극이 짙게 깔려 있다면 막단까지 그 정책은 뿌리내리기 힘들겁니다. 그렇다고 상단부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쉽게 포기를 한다면 그건 한낱 빛좋은 정책으로 잊혀져 갈 것입니다.

내가 하면 사랑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최근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공유지의 비극을 이르는 말입니다. 자신이 객관화가 그만큼 힘들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준이 없는 사회는 늘 이런 갈등으로 대립과 반목을 양산합니다. 지도층 일수록 엄격한 기준과 원칙을 지켜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책 결정자가 본인과 관련된 결정은 특히 신중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비리의 시작이기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공유지의 비극은 이런 자신의 객관화 결핍으로 생기는 비극이기도 합니다. 공직자, 특히 국가에 봉사는 분들이 공유지의 비극을 겪게 된다면 결국은 그 나라가 비극을 겪게 되는겁니다.

한국은 이미 숱한 비극을 겪어왔습니다. 방산청 비리, 원전 비리, 세월호 비리 등 입에 담고 싶지 않을정도의 막장 비극을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공유지의 비극이 여전합니다. 나라일과 개인의 일, 그리고 회사의 일을 분리할려는 공유지의 비극이 여전합니다. 니편 내편을 갈라 내편 만을 챙기고, 내 고향 사람만을 우선시하고, 내 학연만을 챙기고, 내 모임사람들이라면 그 어떤 행동도 용인되고, 그래서 편가르고 무리짓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교육혁명 의식혁명이 무엇보다 절실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