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동남아시아의 필리핀은 기후적 특성상 삼모작이 가능한 나라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쌀이 남아 돌아야 정상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재 필리핀은 주민들이 섭취하는 쌀의 대부분을 태국이나 인도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2008년 세계적인 쌀 파동이 벌어지며 가격이 급등하자 필리핀 정부는 굶주린 주민들이 정부미를 노릴까 두려워 무장군인을 배치했다.

삼모작 필리핀은 왜 쌀 수입국이 됐을까? 원래 필리핀은 1980년대까지 상당히 모범적인 쌀 자급 국가로 분류됐다. 그러나 토지개혁이 실패하고 관개시설 인프라에 대한 정부 차원의 투자가 지지부진하며 1990년대 결국 쌀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기후 환경이 존재해도 이를 운영할 수 있는 정책이 실패하면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는 교훈이다.

필리핀의 사례는 국내 IT 산업 정책에 있어 일종의 타산지석이다.

필리핀에서 삼모작이 가능했던 것처럼 한국의 IT 인프라는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한다. 초고속인터넷과 초연결 인프라 및 스마트폰 보급률 등 다양한 지표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으며 이를 통한 다양한 모바일 혁명의 토양도 잘 구비되어 있는 상태다. 훌륭한 인재도 많다. 글로벌 ICT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 진입하며 “한국은 내수시장은 작지만 테스트베드의 가치가 있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다.

문제는 이러한 강력한 ICT 인프라의 결과물을 좌우하는 정책의 부재다. 나오는 정책들은 대부분 현실과 괴리감이 크거나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 정책은 첨예한 이익집단의 충돌에 있어서 최소한의 중재 역할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당장 택시업계와 ICT 업계가 카풀 및 모빌리티 정책을 두고 충돌할 당시 정부 여당은 택시업계의 맹공에 맥없이 끌려간 후, 결국 지금도 논란이다.

정책을 결정하고 정하는 인선에 대한 문제도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야심차게 출범한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 위원회는 2기를 맞이하면서 사실상 존재감을 거의 상실했고, ICT와 관련된 청와대와 장관 인선도 잦은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최근 청와대 경제보좌관에 발탁된 주형철 전 SK컴즈 대표를 둘러싼 잡음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5G 국가 경쟁력은 떨어지고 있는데 세계 최초 5G 상용화 타이틀에 집착해 야밤에 기습적인 제한적 5G 상용화에 돌입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수박 겉핥기 식, 보여주기식 정책만 남발되면 삼모작을 할 수 있는 필리핀이 최대 쌀 수입국으로 전락한 것처럼, 우리의 ICT 로드맵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ICT 강국 코리아가 언젠가 본연의 강점을 잃고 ‘최대 ICT 수입국’으로 전락하거나, ‘ICT 식민지’로 떨어져 지옥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결국 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