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이준형 토톨로지 대표] 2009년 좀비의 부활 이후, 이들을 치료하는 약물 ‘뉴로트립틸린’이 개발되어 약물 투여와 재활치료를 통해 치료된 좀비를 다시 복귀시키는 조치가 시행된다. 이들에게 ‘좀비’라는 말 대신 부여된 명칭은 PDS, 즉 ‘부분적 사망 증후군(Partially Deceased Syndrome)’이라는 이름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상태가 하나의 질환이며,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것.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과 두려움은 여전하다.

특히 주인공 키어렌의 고향 로튼에서 시작된 인간의용군(HVF, Human Volunteer Force)은 치료를 통해 이성을 되찾은 사람들에게도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해위협을 서슴치 않는다. PDS 환자들에 대한 멸시와 경멸, 위협을 막기 위한 보호법이 발효되지만 이 역시 무용지물일 뿐이다. 

2013년 3월 방영을 시작해 2014년 6월 시즌 2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 BBC의 드라마 <인 더 플레쉬>는 위와 같은 설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좀비가 되었던, 한동안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위협했던 이들을 우리는 다시 이웃으로,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연일 포털 사이트 뉴스란과 SNS 타임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신종 코로나 관련 기사부터 얼마 전 이슈가 된 성전환 군인의 거취 문제, 멀게는 강남역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201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까지의 우리 사회를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는 ‘혐오’다.

댓글란에 ‘더럽다’거나 ‘역겹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은 예삿일이다. 신종 코로나 이슈와 관련해 ‘모든 중국인에 대한 입국금지를 넘어 중국인 체류 전면금지를 선언하라’는 주장, ‘짱께(중국인을 비하하는 표현)는 인간이 아니라 바퀴벌레다’, ‘성전환은 인권이 아니라 정신병이다’, ‘(전역심사를 3개월 연기하라고 권고한 국가인권위원회와 관련해) 센터장 니 딸이랑 1년간 한 방 쓰게 하면 인정해 준다’는 식의 인신공격성 글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추천을 받는다.

이런 혐오의 감정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일까?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의 저서 <혐오와 수치심>을 통해 혐오를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꺼림직하거나 낯선, 혹은 불편한 상대에게 문제제기를 하거나 대화하려 하지 않고, 그저 ‘거부’해 버림으로써 논쟁이나 토론의 여지 자체를 없애는 감정이 바로 혐오라는 것이다.

혐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둔화하는 경제성장과 벌어지는 빈부격차, 나 혹은 우리와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것 같은 상대 집단과 국가, ‘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득권이 줄어드는 상황 등등. 이런 변화는 사람들을 점점 더 불안 상태로 몰아가고, 이런 감정에 매몰된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는다는 구실로 내가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에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저들만 없다면’이라는 생각과 말, 행동으로 혐오의 크기를 키워가는 것이다.

불안을 조금만 거두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지금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모두 추방하면 질병의 위협이 사라질까? 성전환자를 ‘정신병’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배척하는 것이 이슈를 해결하는 온당한 길이었을까? 내가 우한의 주민이었다면, 나의 성정체성이 변하사의 그것과 같았다면 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인 더 플레쉬> 속 등장인물인 빌 메이시는 PDS 환자 릭 메이시의 아버지이자 로튼의 인간의용군 수장이다. 그는 아들 릭이 돌아오자 “내 아들은 좀비가 아니야”라며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결국 릭이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얼굴의 화장을 지우고 다가가자, 그는 자기 손으로 아들을 살해한다. 반쯤 미쳐버린 채로 말이다. 불안의 끝에 다다른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빌의 그것과 닮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쩌면 불안과 혐오를 ‘합리’로 포장한 채 나의 친구 혹은 이웃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