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1989년 방영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가 보여준 2020년은 암울하다. 인류는 기계문명의 폐허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며, 지구는 당장 무너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척박한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30년의 시간을 지나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원더키디의 염세적인 예언과는 동 떨어진, 여전히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비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과 인공지능 등으로 대표되는 ICT 기술의 폐해에 조금씩 노출되고 있으나, 2020년을 사는 우리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더키디의 우울한 예언이 아주 빗나간 것은 아니다. 특히 코로나19로 대표되는 최악의 전염병이 창궐하며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당연한 것처럼 붐비던 봄날의 꽃을 감상하는 것도, 삼삼오오 모여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삶의 단면도 무참히 깨지고 있다. 그 빈 자리에는 당연하게 정복할 수 있을줄 알았던 전염병에 휘둘리는 세계와 공격적인 돈풀기로도 사라지지 않는 '경제의 공포'만 남았다.

연속되어 이어지던 강물에 커다란 바위를 던져보자. 강물은 오랫동안 산에서 시작되어 바다로 흘러갔지만, 바위가 떨어지는 지점부터 아래로의 흐름은 급격하게 변해 전혀 다른 흔적을 남긴다. 코로나19로 인해 달라질 세상. 우리는 바위가 떨어진 강물의 하류를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 출처=이코노믹리뷰DB

인류 역사를 흔들었던 변화의 순간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는 인류의 다양한 문명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한편, 역사를 음미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과감하게 예측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저자의 인류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인류는 지금까지 갖은 고난을 이겨내며 문자 및 기술, 정부의 등장 등 많은 진화를 거듭했으나 무기와 학살, 전쟁을 비롯해 질병이라는 축복받지 못한 사생아들도 동시에 잉태했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2차원의 직선이 아니라 롤러코스터와 비슷한 3차원의 굴곡이며, 저자는 그 나선의 단면을 추적해야 진짜 인류의 역사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저자가 주목한 점은 질병, 전염병이다. 진화생물학자인 제러드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인류는 아직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지 못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막대한 희생이 유발되는 치열한 국지전을 치르고 있다. 

실제로 인류는 아직도 일본뇌염과 말라리아로부터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으며 그 외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1796년 에드워드 네저가 천연두 백신을 발표하며 소소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백신으로부터 살아남은 전염병도 계속 모습을 바꾸며 인류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다.

질병, 역사를 바꾸다
질병의 창궐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

실제로 공격적인 동방원정을 거듭하던 고대 마케도니아의 군주 알렉산더 대왕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도 질병이다. 만약 32세의 젊은 나이에 그가 바빌론에서 하루만에 병에 걸려 죽지 않았다면, 이후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뉴질랜드의 두네딘 의대의 캐서린 홀 박사 팀은 지난해 논문을 통해 알렉산더 대왕이 가면역질환인 길랭-바레 증후군(GBS)에 걸렸을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했다.

고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훈족은 당나라의 대대적인 토벌과 천연두라는 급성 바이러스에 타격을 받아 인구의 30%가 사망하며 서쪽으로 이동, 로마제국 멸망이라는 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뒤흔들기도 했다.

1519년 스페인 모험가들이 상륙했던 남미 아즈텍 문명도, 구대륙의 천연두가 창궐하며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결론이다. 물론 아즈텍 문명의 붕괴에 천연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천연두가 퍼지자 3년만에 최대 350만 명의 멕시코인이 사망했고, 이는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에 충분했다.

20세기도 마찬가지다. 1918년 발병해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대전이 멈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1968년 100만 명을 희생시킨 홍콩 독감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흔들었으며 총 774명의 희생자를 낳아 2002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스(SARS)는 지금까지의 방역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2015년 185명의 환자, 38명의 사망자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는 강력한 방역 시스템의 필요성을 재차 깨닫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물론 인류의 역사가 바뀐 장면에 항상 질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의 저주를 닮은, 우리가 쉽게 제어할 수 없는 존재인 질병이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는 사례는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인류에게 악몽으로 남거나, 악몽으로 남으면서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전을 이끄는 슬픈 희망이 되기도 한다.

흑사병이 단적인 사례다. 신의 침묵에 갇혀있던 유럽의 중세를 깨운 것이 바로 흑사병이기 때문이다.

14세기 처음 유럽에서 발병한 흑사병은 최대 6000만 명의 희생자를 낳아 최악의 역사로 기록됐으며 팬데믹이라는 단어를 처음 인류에 각인시킨 가공스러운 적이다. 다만 흑사병은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나 유럽인들이 맹목적인 신에 대한 복종을 떨쳐내고 찬란한 르네상스로 나아가는 발판도 되어 주었다. 실제로 흑사병 유행 당시에는 허브로 내과 치료를 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카톨릭 사제들이 대중의 큰 신망을 얻던 때였다. 그런 이유로 흑사병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사제들에게 달려가 열심히 기도를 올렸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내 교회에서 축복의 치료를 내리기는 커녕 사제들까지 죽어나가는 장면을 목도하자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성의 시대가 열렸고 인간의 시대가 시작됐다.

코로나19 이후의 시대
2019년 12월 30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중심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리원량(李文亮)은 위챗을 통해 인근 주민 7명이 사스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고 적는다. 인근 화난수산시장에 거주하는 주민 7명을 진찰한 결과다. 그는 의대 동기 7명에게 비슷한 내용을 보내 상황을 공유하게 했다. 질병과 싸우며 역사의 길을 걸어온 21세기 인류의 눈 앞에, 중국 우한에서 발병된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적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의사 리원량은 의료인의 정신에 입각한 정당한 경고를 했으나, 돌아온 것은 당국의 겁박이었다. 그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혐의로 1월 3일 우한시 공안국 산하의 한 파출소로 불려갔으며 '위법 행위를 중단하라. 할 수 있나’란 질문에 '할 수 있다'란 뜻의 중국어 ‘넝(能)’을 손으로 직접 썼다.

그러나 상황은 심상치않게 돌아갔다. 그가 처음 위챗에 코로나19 경고글을 적은 다음날인 2019년 12월 31일, 우한시 위생건강위원회는 27명이 원인불명의 폐렴에 걸렸다고 처음 발표했으며 1월 9일 중국서 첫 사망자가 발생한다. 이후 코로나19는 전대미문의 감염 확산 속도를 자랑하며 중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의사이자 의인인 리원량은 끝까지 환자를 돌보다 2월 7일 새벽 폐렴 증세로 사망하고 만다.

이후 지옥이 펼쳐진다. 코로나19는 전 세계로 퍼져갔고, 세계보건기구 WHO는 결국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한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속출하는 한편 글로벌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각 국은 공격적인 양적완화에 돌입했으나 시장은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않았고, 떨어지는 국제유가까지 겹치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 코로나19로 쇼핑몰이 한산한 모습이다. 사진=박재성 기자

이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언택트(Untact))로 대표되는 비접촉 문화가 두각을 보이는 한편 기업의 재택근무도 일상화됐다. 유통과 제조 거점 모두 셧다운 사태를 일으키며 효율적인 온오프라인 플랫폼 전략에 대한 고민도 깊어진다.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에 각 국의 정치체계는 중대한 변화와 도전을 맞이하고 있으며, 사람과 사람의 물리적인 만남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도 나온다.

이제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겪어보지 못한 길을 가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상을 살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