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삼성전자의 반도체 비전 액션플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그 중심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전격적으로 중국 시안반도체 공장 현장을 누볐으며, 그 직후 삼성전자는 평택 EUV 라인 구축에 나서는 한편 중국에 대한 대규모 인력 파견을 통해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먹거리인 메모리 반도체부터 미래의 먹거리인 시스템 반도체에 이르는 광폭행보다.

▲ 이재용 부회장이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출처=삼성

대국민 사과 후 숨가쁜 행보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6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삼성전자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는 5년 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후 처음이다. 이 부회장은 현장에서 자녀 승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한편 무노조 경영과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강력한 준법 경영의지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특히 미래 비전을 발굴하기 위한 강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2014년에 회장님이 쓰러지시고 난 후 부족하지만 회사를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깨닫고 배운 것도 적지 않다. 미래 비전과 도전 의지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한 차원 더 높게 비약하는 새로운 삼성을 꿈꾸고 있다.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하겠다. 우리 사회가 보다 더 윤택해지도록 하고싶다.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마지막으로 “최근 2, 3개월 간에 걸친 전례 없는 위기상황에서 진정한 국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실히 느꼈다”면서 “대한민국의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 메시지 중 핵심인 강력한 비전발굴은 이내 현실이 됐다. 당장 13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과의 전격적인 회동이 눈길을 끈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과 현대차 임원들은 충남 천안 성성동에 위치한 삼성SDI 공장을 방문해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인 전고체 전지 기술에 대한 설명을 청취했으며, 이 자리에는 이재용 부회장도 함께 했다.

삼성이 보유한 전고체 전지 기술을 바탕으로 회동이 성사됐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일각에서는 전고체 전지 기술이 아직 상용화되려면 시간이 올래 걸리기 때문에 더 내밀한 회동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본다. 일각에서 전기차 배터리 전반에 대한 협력을 넘어 자동차 분야에서의 전격적인 시너지 창출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 부회장의 광폭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8일 진교영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 사장, 박학규 DS부문 경영지원실장 사장, 황득규 중국삼성 사장 등과 함께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시안반도체 사업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과거에 발목 잡히거나 현재에 안주하면 미래는 없다"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거대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때를 놓치면 안된다"고 말했다.

22일에는 증설 인력 300명을 추가로 파견하며 반도체 굴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반도체의 모든 것
이 부회장의 승계 과정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의 칼날이 번득이는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정의선 수석부회장과의 회동을 시작으로 반도체 굴기에 적극 나서는 분위기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말 그대로 불확실성의 시대다. 미국은 화웨이와 자국 기업의 거래 중단 기간을 연장했으며, 아예 제3국을 통한 화웨이 반도체 수급을 막아버리려 움직이고 있다. 큰 틀에서는 아시아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화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만의 TSMC 미국 공장 준공을 끌어냈으며, 단기적으로는 역시 화웨이에 대한 정밀타격에 나섰다는 말이 나온다.

중국도 반격하고 있다. 21일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개막한 가운데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발표하는 한편 ICT 및 첨단 과학 기술 분야에 1730조원을 투입하는 기술부양패키지도 공개할 예정이다. 중국의 기술굴기를 꺾으려는 미국의 압박에 정면승부를 거는 한편, 홍콩 국가 보안법 제정을 통해 홍콩 민주화 진영을 지지하는 미국의 예봉을 차단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대결모드는 삼성전자 반도체 인프라에 있어 위기상황이다. 화웨이와 TSMC의 거래가 차단될 경우 삼성전자가 단기적으로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리스크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이 대목에서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당장 시안반도체 공장 출장을 통해 전반적인 생산거점 점검을 진행하고, 중국과의 일부 관계개선에 집중하는 행보가 보인다.

중국 리커창 총리가 지난해 10월 삼성전자 시안반도체 현장을 찾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중국 시안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것은, 2014년 5월 공장이 들어선 후 처음이다. 리 총리의 당시 방문은 여러가지 포석이 있었다. 특히 외국 기업의 탈 중국 행렬을 의식한 것이라는 의견이 눈길을 끈다. 미중 무역전쟁이 가속화되는 한편 인건비 부담이 커진 글로벌 기업들이 속속 중국을 떠나는 가운데, 리 총리가 '그럼에도' 자리를 지킨 삼성에 대한 믿음을 보여줬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리 총리는 당시 공장을 방문해 "중국 대외 개방의 문은 더 커질 것"이라면서 "우리는 지식재산권을 엄격히 보호하고 중국에 등록한 모든 국내외 기업을 동일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당시 현지 스마트폰 공장을 철수했으나 시안반도체 공장은 유지한 가운데, 리 총리가 현장을 찾아 삼성과의 동맹을 재확인한 셈이다.

그 연장선에서 이 부회장이 리 총리가 보여준 동맹과 화합의 장을 전격적으로 찾으며 중국 반도체 생산 거점의 안전성을 확립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부회장이 출장 기간 중국 산시성(陝西省) 후허핑(胡和平) 서기 등 현지 정치인들과 만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직후 삼성전자가 평택 EUV 라인 구축을 발표한 점도 눈길을 끈다. 중국 출장이 현지 메모리 반도체 생산 거점 확립과 중국과의 연대를 상징한다면, 평택 EUV 라인은 새로운 먹거리인 파운드리 시장 공략의 본격적인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월 2030년까지 133조원의 투자를 단행,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최강자를 노린다는 계획인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그 연장선에서 이번 평택 EUV 라인은 올해 초 V1 라인 가동에 이은 또 하나의 삼성 반도체 비전 2030 액션플랜이자 파운드리에 대한 속도전으로 풀이된다. 평택 EUV 파운드리 생산라인은 2021년 하반기부터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7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 기반 제품의 생산 규모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할 전망이다. 5나노 제품을 올해 하반기에 화성에서 먼저 양산한 뒤, 평택 파운드리 라인에서도 주력 생산하는 것이 목표다.

마침 대만의 TSMC가 미중 무역전쟁의 유탄을 맞은 상태에서,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행보는 더욱 선명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 평택 EUV 공장. 출처=삼성

23일 300명 인력의 중국 시안 투입은 다시 메모리 반도체 집중 전략의 일환이다. 파견인원은 시안 2공장 증설에 필요한 본사와 협력업체 기술진이며, 현지 80억달러 규모의 2공장 2단계 투자의 일환이다. 2공장의 주력은 V-낸드플래시며, D램과 비교해 회복세가 가파른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속도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국민 사과 후 몽골기병 전략을 가동하는 이 부회장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영역에서 단기간에 전광석화같은 액션플랜이 속속 가동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메모리와 시스템을 아우르는 뉴삼성의 밑그림에 시선이 집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