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를 침공하며 걸프전쟁이 시작됐다. 개전 초반 이라크의 공세에 쿠웨이트 왕가가 망명정부를 꾸리는 등 이라크에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1991년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UN군이 사막의 폭풍작전을 통해 이라크의 제공권을 장악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어 1991년 2월 24일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미 기갑사단의 진격으로 전쟁은 끝난다.

걸프전쟁은 최초의 하이테크 기술이 투입된 전쟁이자 TV라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여론(輿論)을 움직인 최초의 사례라는 상징성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중동의 핵심적인 산유국들이 직접적으로 정면대결을 펼쳤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걸프전쟁의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원유였다. 당장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국제원유 시장에 공급과잉을 시도해 국제유가를 의도적으로 떨어트렸다 의심했으며, 심지어 쿠메일라 유전지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막판 후퇴하는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의 주요 정유시설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결국 걸프전쟁은 검은황금 석유를 둘러싼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비극이다.

▲ 출처=갈무리

코로나19, 원유왕국의 종말?
인류는 지금까지 검은황금 원유를 둘러싸고 극단적인 정치행태인 전쟁까지 불사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그 견고한 체제에 미묘한 균열이 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시작은 여행업 타격이다. 코로나19가 발발하자 각 국은 이동제한령을 내렸으며 여행업과 항공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당장 원유수요가 급감할 것을 우려한 OPEC은 러시아와 함께 감산에 돌입하려고 했으나, 러시악가 이를 거부하자 즉각 증산경쟁에 돌입했다.

예전이라면 각 국이 산유국들의 증산에 겁을 먹고 긴급태세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파괴적인 변수는 산유국들의 증감산과 상관없이 에너지 업계의 패권을 교란했고, 결국 OPEC과 러시아는 어설픈 치킨게임을 빠르게 접고 본격적인 감산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점이다. 사우디가 일평균 산유량을 1250만 배럴에서 850만 배럴로 줄였으나 즉각적인 감산에 나서지 않고 초반 증산 경쟁을 벌인 대가는 가혹했고, 국제유가는 최근 30달러 중반까지 회복됐으나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반토막이 났다. 산유국들이 머리를 대고 뒤늦게 필사적인 감산에 돌입해도 코로나19라는 불확실성을 제어할 수 없음이 드러난 셈이다.

당장 부의 상징인 산유국들이 흔들리고 있다. 각 국이 코로나19로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공격적인 양적완화 조치에 나서고 있으나, 산유국들은 오히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올 1분기에만 90억달러 규모의 재정 적자를 기록한 사우디는 외환보유액이 근 20년만에 가장 빠르게 감소하며 데저트 밸리 계획인 비전 2030 계획을 축소하고 있다. 무려 80억달러나 감축하며 탈오일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오만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태양광 사업을 접었으며 공무원 급여를 삭감했다. 오일왕국의 기둥에 균열이 가고있는 셈이다.

▲ 출처=갈무리

앞으로도 문제
코로나19라는 파괴적인 변수앞에서 산유국들의 오만도, OPEC의 공급 중심 에너지 패권 전략도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지난 시기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불사해서라도 얻으려 했던 검은황금의 존재감이 흐릿해지는 순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산유국들이 검은황금의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불확실성의 변수가 덮칠 경우 산유국들은 시장을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이 증명됐고, 무엇보다 증산과 감산에 있어 일사분란함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확인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공포의 대상이던 OPEC은 이제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시장을 좌우할 힘이 사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이후도 문제다. 여행업과 항공업이 정상화된다고 해도, 글로벌 에너지 패권의 핵심에 원유가 든든히 자리잡을 것이라 보는 시각은 많이 희석됐기 때문이다.

특히 천연가스의 재조명이 부담스럽다. 가뜩이나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각 국은 탈원전을 거쳐 천연가스에 속속 집중하는 분위기다. 환경오염 부담이 적고 신재생에너지로 각광받는 천연가스의 존재감이 커진다면,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존재감이 약해진 원유시장은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만약 수소경제가 탄력을 받을 경우 천연가스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저유가 기조가 길어질수록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강해진다.

물론 글로벌 에너지 업계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공급 중심의 시장 제어가 원유 시장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된 가운데, 신재생 에너지의 반격은 원유시장의 종말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