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산풍경, 65.2×53㎝ oil on canvas, 2009

내가 종학을 처음 만난 것은 고독, 불안, 절망 같은 언어들이 휴머니즘이라고 읊조리던 시절이었다. 때 묻은 고무신짝에 막걸리를 돌리며 낙산위에 걸린 초승달 보고 우리는 세잔과 보들레르를 사랑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우리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세라믹 벽화를 공동으로 제작한다.

우리는 공교로이 초대전이나 국전뿐 아니라 삶의 궤적 가운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금도 변함이 없다. 종학이는 나무를 참으로 잘 아는 친구다. 66년 도쿄국제판화 비엔날레에서 나무판에 새긴 ‘역사’라는 목판화로 상을 받더니 슬금슬금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목기를 찾아 골동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한다. 일정한 수입도 없으면서 그림 팔아 돈이 좀 생기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골동가게를 헤집고 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목기 귀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 설악산풍경, 162×130.5㎝ oil on canvas, 2007

종학이는 학생 때 별스럽게 모딜리아니와 르동의 그림을 좋아했다. 병약한 몸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음악과 시를 사랑했던 르동을 사랑했다. 르동은 한때 인상파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그 방법에 동조하지 않고 판화와 소묘에 열중하더니 쉰 살이 넘어 파스텔과 유채로 화려한 색채를 구사하며 시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완성한다.

종학이도 한때 앙포르멜운동에 참여하고 개념적인 설치작업으로 도쿄에서 개인전도 가졌다. 그리고 뉴욕에서 판화연습 하다가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더니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손을 툴툴 털고 홀연히 설악산 자갈밭에 자리를 펴고 그의 사랑하는 딸에게 편지를 쓴다.

“설악산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텅 빈집에서 밤마다 별을 쳐다보고 달을 보고 설악산의 밤은 왜 그다지도 낮게 떠서 빛나고 있었던지. 하여간 열심히 밤하늘을 보며 백 장의 좋은 그림을 그리고 죽자. 백 장만이라도 그릴 때까지 살자며 입술을 깨물고 그림을 그린 것이 오늘의 나비, 꽃 그림들이 나오게 됐단다. 낮에는 그 넓은 벌판을 헤매며 열심히 꽃과 나비를 봤단다. 거기서 아빠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십 년 박혀 괴로워했던 그림의 방향도 전환점도 찾아냈다.”

▲ 설악산풍경, 45.5×53㎝ oil on canvas, 2009

◇시비와 가부를 초월한 듯

종학이가 그리는 그림의 주제들은 단순하다. 산과 나무와 꽃들, 그리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별과 나비와 새들이 전부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그들 사이를 기웃거리지만 아무래도 나비나 텃새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스산한 바람소리, 물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그림의 실마리가 되는듯하다.

요즈음 친구는 점점 말이 없다. 시비와 가부를 초월한 듯하다. 꽃을 그리지만 꽃을 그리지 않고 있다. 나비를 그리지만 나비를 그리지 않고 있다. 그는(KIM CHONG HAK, 金宗學, 김종학 화백) 색채의 뒤엉킴이 빚어내는 색채와 형태들 때문에 꽃과 나비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가 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뒤범벅이 된 색채와 형태 속에서 전율한다. 그는 이러한 화면과의 일체를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림일 뿐이야.”

△글=윤명로(서울미대 명예교수)

△전시=통인화랑 통인옥션갤러리(Tong-In Gallery, TONG-IN AUCTION GALLERY), 5월20~6월21일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