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읽게 된 인터뷰를 보며 크게 공감한 일이 있었다. 뮤지션 김사월과 요조, 작가 이슬아, 이윤서가 함께한 인터뷰였다. 채식주의자로 알려진 그녀들은 함께 모여 비건 음식을 만들고, ‘채식’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채식을 시작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요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동물을 마음껏 귀여워하고 싶었어요. 트위터에 올라오는 귀여운 동물의 영상을 즐기는 동시에 소비하는 모습이 이중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나 역시도 일 년 전부터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레어로 구워진 스테이크를 볼 때면 육즙보다 핏물에 더 눈이 갔고, 생닭 위로 오슬오슬 솟아오른 닭살을 마주 보기가 거북했다. ‘귀여운 동물’과 ‘맛있는 고기’ 사이를 오가는 불편함이 날로 커져만 갔다. 이렇게 죄스럽고 불편할 바에야 그냥 고기를 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곧장 ‘비건 지향 생활’을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채식을 하지만 아주 가끔 육식을 겸하는 플렉시테리언 flexitarian이며, 대부분은 유제품과 난류, 어류를 허용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 pesco-vegetarian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채식을 시작한 후 주변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나도 채식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며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러다 건강 해치는 거 아니냐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왜 채식을 하게 되었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혹시 채식이 다이어트에(또는 피부미용에) 도움이 되는지 물어오는 이도 있었다. 때로는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는데, 이들은 대개 채식 지향인들에게 ‘완벽’을 넌지시 요구해왔다.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식이다.

“채식한다면서 왜 생선이랑 달걀은 먹나요?”

“식물을 재배해 먹는 것도 생태계를 해치는 행위 아닌가요?”

“농사를 짓기 위해서도 수많은 동물들이 희생당하는 건 알고 있는지요?”

“환자나 아이들처럼 꼭 육식이 필요한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다 어쩌라는 건가요?”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모든 인간은, 아니 모든 존재는 일단 태어난 이상 다른 존재들에게 빚을 지며 살아요. 일종의 ‘원죄‘같은 거 아닐까요? 제아무리 노력해도 도덕적으로 완벽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제게 가능한 방식으로 채식을 하고 있어요.”

위와 동일한 인터뷰를 통해, 작가 이슬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채식하면서 내가 완전무결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녀의 말처럼 채식을 지향한다고 해서 완전무결한 사람이 될 리는 없다. 동물권 뿐만 아니라 노동권, 여성권, 환경권 등 무엇을 지향하든지 마찬가지다. 타자를 향한 모든 움직임은 내게 주어진 부채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스스로가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