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이 무선사업부장을 맡고있던 2016년 2월, 그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MWC 2016 기자회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바로 "삼성전자가 하드웨어 회사라는데 동의할 수 없다"는 멘트다.

시간이 흘러 2020년, 고 사장의 뒤를 이어 무선사업부를 책임지고 있는 노태문 사장은 5일 온라인으로 열린 갤럭시 언팩을 통해 갤럭시노트20을 비롯한 다양한 모바일 하드웨어 기기를 전격 공개했다.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극강의 하드웨어 플랫폼 면면이 강조됐다는 평가다. 다만 2020년 갤럭시 언팩 그 어디에도 삼성전자의 소프트웨어 전략은 뚜렷하게 찾아볼 수 없었다. 삼성전자는 극강의 하드웨어를 택했다.

▲ 출처=갈무리

화려한 하드웨어
삼성전자가 갤럭시 언팩을 통해 공개한 하드웨어 라인업은 말 그대로 '끝판왕'이다. 갤럭시노트20은 현존하는 모든 최신 기술을 집대성했으며 S펜은 날카로워졌고 삼성 노트와 덱스의 생산성은 상상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특히 기기에서 여러 개의 파일을 바로 전송할 수 있는 UWB 기술은 삼성전자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언팩서 공개된 갤럭시 버즈 라이브는 총 3개의 마이크와 가속도 센서를 활용해 더욱 강화된 통화 품질을 제공하며, 12mm의 전작 대비 더 큰 스피커도 탑재됐다. 각 기기와의 연동도 강해졌고 무엇보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까지 제공한다. LTE와 블루투스 모델로 출시되는 갤럭시 워치3는 헬스를 중심으로 하는 스마트워치 진화의 최종지향점을 보여줬고 갤럭시 탭S7의, 갤럭시Z 폴드2는 삼성전자가 왜 하드웨어의 제왕인지 잘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외신의 반응도 뜨겁다. 폰아레나는 갤럭시노트20을 두고 "삼성이 제공하는 최고의 카메라와 S펜을 여전히 원하는 실용적인 사용자를 위한 제품"이라 평했으며 갤럭시 워치3를 두고는 "다양한 옵션이 눈길을 끈다"고 호평했다. 더버지는 갤럭시노트20 울트라의 50배 줌을 두고 "상당히 기민하고 빠르다"고 평했으며 나인투파이브구글은 갤럭시Z 폴더2를 평하며 "의미있는 혁신"이라 추켜세웠다.

▲ 출처=갈무리

소프트웨어를 담을 그릇?
갤럭시노트20부터 갤럭시Z 폴드2까지. 삼성전자는 이번 언팩을 통해 역대급 하드웨어 기기를 무려 5개나 발표했다. 여기까지는 이견이 없다. 갤럭시노트7과 같은 불상사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삼성전자는 하반기 다소 주춤할 것으로 여겨지는 반도체를 대신해 갤럭시 오형제를 중심으로 만루홈런을 쳐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번 언팩을 통해 삼성전자의 소프트웨어 전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점은 의외라는 말이 나온다.

2016년 MWC 2016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고동진 사장은 “가상현실 시장에서 페이스북과의 협력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삼성전자는 하드웨어, 구글과 페이스북이 소프트웨어를 맡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삼성전자는 하드웨어만 국한되지 않고 녹스, 삼성페이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성과를 거뒀다. 삼성전자는 소프트웨어에서도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고 강조했다.

고 사장의 당시 발언은 모바일 시대의 소프트웨어 시장 패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바다에 이어 타이젠까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모바일 운영체제 실험을 했으나 대부분 실패, 혹은 '피봇'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iOS와 안드로이드로 대표되는 모바일 양강체제를 흔들 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상황에서, 고 사장이 꿈꿨던 것은 '포스트 모바일' 시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공지능이 사실상 운영체제가 되어 펼쳐지는 새로운 초연결의 시대, 삼성전자는 더 이상 하드웨어 전문기업이 아닌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 고동진 사장. 출처=삼성

이후 고 사장이 호언한 것처럼 삼성전자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나름의 행보를 보였다. 특히 비브랩스를 인수한 후 인공지능 빅스비를 야심차게 출시하며 다양한 기회를 엿봤다.

하드웨어에 강점을 가진 상태에서 유연하게 소프트웨어를 노리는 전략도 선명해졌다. 이미 하드웨어라는 그릇을 가진 상태에서 소프트웨어의 확산을 꾀할 수 있는 강점을 확보했으니 여기에 착안해 빠르게 시장을 석권한다는 의지다. 

실제로 지난 2018년 김현석 삼성전자 사장은 IFA 2018이 한창이던 독일 웨스틴 그랜드 호텔 기자회견에서 "전 세계에서 연간 5억대 이상의 디바이스를 판매하는 회사는 삼성전자가 유일하다"고 말한 바 있다. 5억대 이상의 하드웨어 디바이스를 창출하는 삼성전자가 그 위에 자체 역량으로 구축한 소프트웨어 기능을 올려 빠르게 소프트웨어 시대를 좌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 김현석 사장. 출처=삼성

그러나 2020년에 이른 삼성전자는 소프트웨어 전략 자체를 담백하게 제거했다. 물론 신제품 발표인 언팩의 특성상 삼성전자 고유의 소프트웨어 전략이 공개될 이유가 없다는 말도 나오지만, 다양한 모바일 기기를 선보이며 자체 소프트웨어 전략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미묘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신 삼성전자는 소프트웨어를 가진 회사와의 긴밀합 협조, 나아가 그들을 위한 그릇을 제공하는 선에 머무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밀월이다. 삼성전자는 이번 갤럭시 언팩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와의 클라우드 게임 합동전략 등을 발표하는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갤럭시 기기에서 자유롭게 구동되는지, 또 얼마나 많은 콘텐츠를 갤럭시 기기에서 제대로 가동시킬 수 있는지만 강조했다.

안드로이드 체제에 순응해 이를 극대화시킨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 일반적인 제조사들의 분위기도 강해졌다. 삼성전자는 최근 자사 프리미엄 스마트폰의 운영체제 업데이트 기간을 종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기로 했다.

▲ 출처=갈무리

하드웨어의 신 택하다
글로벌 ICT 전자 업계는 일반적으로 소프트웨어 기업이 큰 그림을 그리며 시대를 재창조하면 하드웨어 기업이 그에 맞는 그릇을 하청으로 제작해 생태계를 완성시켰다. 이런 관점에서 하드웨어의 신을 택한 삼성전자의 선택에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시장의 주도권은 소프트웨어에 있으며, 시대를 여는 방향성도 소프트웨어 기업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다만 삼성전자는 이번 언팩을 통해 하드웨어의 신을 택하면서도, 능력있는 외부의 소프트웨어 기업들과 능동적으로 만나 소모적인 리소스 낭비를 피하는 선택을 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소프트웨어 기업이 시대의 기준을 만든다고 하지만, 점점 발전하는 소프트웨어 생태계는 어느덧 통신의 5G와 같은 기간 인프라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소프트웨어 기업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네트워크가 10이었다면, 이제는 100이나 1000을 넘기는 시대다. 그런 이유로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그 숫자도 많아져 경쟁이 치열해지는 한편 통신사들과의 새로운 관계정립도 중요해졌다 볼 수 있다. 또 다른 기간 인프라 중 하나인 클라우드야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충분히 품어낼 여지가 있으나 통신 인프라는 불가능하고, 이는 소프트웨어 기업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O2O 사업의 추이를 봐도,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도래하는 세상의 주인은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을 온라인 마인드로 제어하는 사업자다.

삼성전자는 여기에 착안해 꼬리(하드웨어)가 머리(소프트웨어)를 흔드는 전략을 택했다. 단기적으로는 극강의 하드웨어를 제작해 당장의 매출을 거두고, 장기적으로는 입지가 좁아진 소프트웨어 기업들을 하드웨어의 삼성전자가 '줄 세우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물론 삼성전자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유일한 하드웨어의 신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갤럭시노트20 등을 통해 본 삼성전자의 하드웨어 기술력은 말 그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가능성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