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 얼만큼 사랑해?”

남자는 여자어(女子語)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 인류가 출현한 지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역사가 흘렀지만 아직도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할 때, 쉽사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본 방송이 언제인지도 잘 모르지만, 주말 오후에 어디선가에서 언제 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예능 프로그램을 계속 하니 토막토막 볼 기회가 있다. 최근에 본 내용 중에서 5명의 남자 연예인을 초대해 놓고 한 여성 가수가 남자들의 연애능력을 테스트 해본 것이 있었다.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거기에 등장하던 초대받은 남자들 5명과 MC로 출연했던 3명 그리고 나까지 도합 9명이 생각한 답변이 여성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남자들 수준에서는 생각 가능한 답변이 거의 모두가 나온 것 같았다. 아재들이라면 금방 머릿속에 떠오를 법한 말인 ‘하늘만큼 땅만큼’도 있었고, ‘니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라는 조금은 약삭빠른 답변도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라는 조금 엉뚱한 답도 있었는가 하면 ‘이 세상 사랑이 다할 때까지’라는 낭만적인 답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생각하는 답에는 전혀 근접하지 못했다.

살면서 나도 이 같은 질문을 참 여러 번 받았다. 뜬금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이런 질문에 경상도 남자들은 난감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나 말고도 이 세상 모든 경상도 남자들은 비슷하게 생각하지 싶다. 신혼 초라면 모를까 그 잠깐 달달 했던 시기를 벗어난 뒤로는 ‘왜 자꾸 그렇게 물어보냐?’, ‘이미 몇 번씩이나 대답했잖아’, ‘뭐가 못 미더워서 자꾸 의심하고 그러냐?’고 면박만 준 것 같다. 내 주위의 경상도 어르신들은 그런 질문에는 ‘거참, 쓸 데 없이,,,,’라며 혀를 차기만 하는 것도 많이 봤다.

 

같은 한국인끼리 나누는 외계어 대화

한참 만에야 알게 된 정답은 완전 엉뚱했다. “내가 더 잘 할게”였다. TV 속에 있던 남자들이나 나 역시도 그제서야 ‘헉’하면서 이해가 됐다. ‘여자들은 정말 얼마나 사랑하는 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남자들이 뭔가 못마땅해졌을 때 이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동원하는 말이 ‘얼마나 사랑하는 지에 대한 질문’이 아닌가 하는 결론이다.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과연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여자어는 남자들이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불가능한 외계어나 마찬가지다.

‘난 충청도 사람이라서 충분히 이해가 됨!’

또 다른 케이스가 있다. 어느 날 페친의 글이 올라왔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글을 읽어 보자니, 역시 TV 프로그램 내용이었다. 서울촌놈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효주와 이범수라는 배우들이 출연한 모양인데, 거기서의 대화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뭘 먹을지 말지에 대한 간단한 질문에도 충청도 사람에게는 적어도 세 번은 물어봐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 이거 먹을래?” “아냐 괜찮아.” --- 형식적인 거절, 여기서 그치면 안되고 또 물어야 함

“진짜? 진짜?”  “어휴 괜찮아 안 먹어도 돼.” --- 근데, 한번 더 물어봐야 됨

“정말, 안 먹어?” “그럼 뭐 조금 맛이나 볼게.” --- 결국 먹는다는 얘기였음

와우!정말 어렵다. 첫 번째 질문에서 충청도 사람들은 대부분 형식적인 거절을 한다는데, 상대가 거절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면 안 되고 두 번은 더 물어봐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한번 물어봤는데 더 물어보지 않으면 충청도 사람들은 진심으로 물어본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 방송을 찾아본 나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방송을 직접 찍은 출연진들도 이해불가의 웃음 뿐이었다.

한번이 아니라 세 번은 물어봐야 진심을 얘기하는 사람들의 생활 섭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뼛속부터 경상도 출신이라, 뭐든 짧고 간명하게 하는 단호박 스타일이 몸에 배어 있다. 다만 태생부터 내성적인데다가 느린 터라 누가 내게 뭘 권하거나 했을 때도 속으로는 먹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아도 말로 나오기까지 보통의 경상도 사람들보다 좀 느렸기에, “아,,, 그거 ,,,,,,” 하는 사이에 벌써 내게 질문한 사람에겐 결론이 “안 먹는다고? 알았어”가 되어 있었던 적이 많았다. 나중에 다른 얘기를 나누면서 ‘실은 나도 아까 그거 좋아해’라는 뉘앙스를 비췄을 때의 반응은 ‘그래? 빨리 말했어야지’가 끝이다.

웃음의 소재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각 지역마다 쓰는 말이 조금씩 다르고, 그런 말과 관련하여 대화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에피소드들을 많이 다룬다. 한때 경상도 사투리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경상도 말로 하면 ‘내 아를 놔 도’ (내 아이를 낳아줘)로 표현해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친한 사이라면 이 정도 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우스운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성별이 달라서 겪는 에피소드는 인터넷 상에 너무 많다. 그리고 지역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대화와 관련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각 조직이 가지고 있는 말에 대한 의미나 뉘앙스가 제 각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직장을 한번 옮기는 것이 군입대를 한번 더 하는 것과 같은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압박을 받는다고들 한다. 비단 물리적인 장소나 근무 환경이 달라져서 겪는 것 보다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눈높이 그리고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에 대한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때는 몰랐다.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한 겨울에 눈 내리는 소리 하지 말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생각한 느낌은 ‘아, 내가 발표한 얘기가 뭔가 부족해서 썰렁하다’는 말로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날 회의가 끝나고 난 뒤 자정이 가깝도록 자료를 수정하고 보완했다. 그렇게 수정한 자료를 몇 날 며칠을 두고 개선시켜서 자료를 들고 갔다. 물론 아주 높으신 분이었다. 아주 정갈하게 결재판에 끼워져 정리되어 있는 자료를 펼쳐 보더니, 앉은 자세에서 나를 휙 올려본 뒤 한 마디를 더 했다.

“이 자료 왜 또 가져왔어?”

“지난번 자료가 아니라, 거의 완전히 수정하고 보완한 자료입니다.”

“가져 가.”

“예??????”

사무실을 나온 뒤에 경영진 임원들 방을 이 방 저 방 들락 거리면서 자료를 들이밀고 계속 물었다. 임원진 대부분들도 그때 생각은 나와 비슷했다. ‘왜 그러실까?’, ‘혹시 여전히 자료가 미진한 게 아닐까?’, ‘아니면 니가 뭔가 불쾌하게 해 드린 거 아냐?’하는 반문들만 이어졌다. 구조본의 부사장이 내게 당부했다. “담에 언제 이 자료 찾으실지 모르니까 계속 킵하고 있어.”

하지만 그 자료는 그 뒤로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었다. 한참 뒤에 그 분을 오랫동안 보좌한 다른 임원과 차 한잔 나누면서 알게 됐다.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어?어떤 분위기셨어?”

“별다른 분위기랄 게 없었습니다만.”

“고생만 했구먼. 다음에 그 자료를 다시 찾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는데, 십중팔구는 드랍일 거 같은데.”

“예, 저도 겪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 하면서 겪는 애환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사실은 이렇게 결론이 분명하지 않은 소위 윗분들의 태도와 말 때문에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말씀 하셨으니 ‘그 기안은 물 건너 가겠구나’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내버려 뒀다가, 그 다음 번 회의 때 찾기라도 했다면 낭패였을 것이다. 반대로 ‘집어 쳐’ 같은 분명한 결론이 나지도 않았고, 당시에 같이 들었던 다른 임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비록 다시는 햇빛을 보지는 못해도 고치고 또 수정하는 번거로운 헛일을 한 것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사고 터지지 않고 나만 조금 더 고생하는 것으로 끝났으니까 말이다. 이게 소위 회사 일이다. 헛일을 위해서 엄청 고생들 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전문가들을 영입하게 되는데 예전에 근무하던 곳은 좀 특수한 곳이어서, 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된 경영진과 대주주의 특수관계인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웬만한 회사 임직원들은 이 두 사람과 엮일 일이 없었지만, 커뮤니케이션 담당인 나는 달랐다. 툭하면 이쪽에서 부르고, 저쪽에서 시달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기울면 그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때문에 눈치를 잘 보고 중도 노선을 탈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양 쪽에서 아주 상대를 존중하며 치하하곤 했지만, 나중에 보면 생각과 한참 달랐다.

말들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중도 노선을 탄다고 해서 그냥 양측의 가운데 정도에 해당하는 노선을 고집했다가는 경을 치르게 된다. 내가 생각한 중도 노선은 양쪽의 기분이나 그 밖의 상황을 적절히 고려한 중도노선이었다. 하는 말들도 아는 사람들만 해석할 수 있는 회사어(會社語)다. 사전에 나오지도 않는 특수한 언어다. 그건 나만 겪은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조직들에서 소위 ‘을’이라고 하는 샐러리맨들은 통역 불가의 회사어를 배우기 위해 상처 받고 깨지고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그런 회사어에 정통한 사람들만 살아남는 웃픈 현실,이제는 좀 달라질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