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부모가 초등학교를 찾아가 담임의 멱살을 잡았다.

실제 있었던 얘기라고 하는데, 소방관 직업을 가진 학부모가 자녀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찾아가서 선생님의 멱살을 잡았다는 얘기가 한동안 온라인에서 회자되었다. 처음엔 ‘설마 학부모인데 선생님의 멱살을 어떻게 잡을 수 있어?’라는 생각에 장난친 내용이려니 했다. 우리 다음 세대라면 몰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 학부모라면 우리 나라에서 그럴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직업이 소방관이잖은가?

실제 내용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그 소방관 아빠는 항상 ‘화재 경보가 울리면, 무조건 건물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에게 만연해 있는 안전불감증 때문에 화재 경보가 울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피하지 않아서 죽은 사람들이 많다. 아빠는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화재 현장에 출동하면, 화재 경보 때에 대피만 했어도 살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늘 강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생 자녀가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에 학교에서 화재 경보가 울린 일이 있었다. 그 아이는 경보 소리를 듣자마자 아빠의 말을 떠올렸고, 재빨리 같은 반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이를 본 담임 선생이 “수업 시간에 뭐 하는 짓이냐?”고 야단을 쳤다. 그러면서 선생은 주동한 그 아이를 불러다가 야단을 치고 뺨까지 때렸다고 한다.

그날 오후 집에서 아이는 있었던 일에 대해 소방관 아빠에게 사실대로 털어놨다. 그러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소방관 아빠는 학교로 찾아갔고, 담임 선생을 찾아가서 바로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만약에 진짜 화재가 발생했다면 어쩔 거였냐? 아이들 다 죽이려고 작정했어?” 그 소동을 지켜보던 다른 선생님들도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는 “그 선생이 잘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담임 선생은 아이에게 마지못해 사과를 했고, 소방관 아빠는 자녀에게 “잘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현실은 생존 경고 앞에서 너무나도 의연해

사무실에서 앉아서 일을 할 때에도 가끔씩 이런 일이 있었고, 마트인지 외부에서 경보가 울려 간담이 서늘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데 화재 경보가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피하기 보다는 서로 웅성거리면서 눈치만 봤다. ‘뭐지?’ ‘장난이나 오작동이겠지?’라는 말로 자기들끼리 말만 주고 받았고, 고개만 두리번거렸다. 대부분은 오작동이거나 경보기 점검 차원이었다. 그러면 ‘아, 다행이다’며 다시 제 할일 했던 기억이 있다.

은연중에 우리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아마 대부분이 비슷할 것인데, 특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심하지 않나 싶다. 막판까지 불이 난 것이 진짜 확실해서 대피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지, 아니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해프닝으로 끝나게 될 장난에 속지 않으려는 배포인지 모르지만, 기가 센 우리나라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 같은 새가슴들은 우왕좌왕 하며 현실 파악이라도 나서지만, 정말 일부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눈도 꿈쩍하지 않는 기개를 보인다.

코로나19 펜데믹 상황이 어느덧 7-8개월 상황을 넘어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몇 년은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주문하고 있다. 제 아무리 인구수가 많다고 해도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하룻밤 새 수만 명의 확진자가 생기고, 수백 명에서 기천 명의 사망자가 생긴다면 이것이 아비규환이 아니고 무엇일까? 조금만 방심해도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겉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정말 용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고, 그 피해가 상상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방역당국에서는 동해바다가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질 만큼 많은 주의와 경고를 보냈다. 모이지 말고 접촉을 말고 마스크를 잘 쓰자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기본적인 이행을 무시한 채 대범한 기개를 보이며 수 많은 사람들의 헤아릴 수 없는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지하철 승객들로부터 마스크 착용 요청을 받은 어떤 사람이 승객들에게 마구잡이 행패를 부린 동영상이나 버스 기사로부터 요청을 받은 또 다른 사람이 기사를 구타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경고를 무시하고 대규모의 인원들이 밀집하게 모인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팔순 노모를 모시고 있기에 행여라도 정말 만일의 하나라도 가정을 하는 순간 머리털이 쮸뼛 선다. 또 시골에 연로하신 고향 친척 어르신들이나 암수술, 심장수술, 그리고 그 밖의 수술 경력이 있으신 일가친척들이 눈에 아른거려서 감히 이번 추석에는 고향 앞으로 가는 일은 삼가 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다. 더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후의 마지노선은 넘지 않는 것이 서로를 지켜주는 그래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초초 인텔리전트빌딩에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서 5G 아니라 그 이상이 설치된 시대다. 이를 바탕으로 난연성 소재니 조기 경보 시스템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초현대 시설이 설치된 빌딩이라 하더라도 사무실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사람을 건물 밖으로 들어내 주지는 못한다. 또, 제아무리 코로나 치료제가 흔해져도 일부러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상황이라면 병의 재발과 확산을 막을 길이 없다.

초현대식 빌딩, 놀라운 통신 시스템 및 그 밖의 발전상이 하이라이트로 돋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화재 경보에 뛰쳐나가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로우라이트를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백신이니 치료제와 같은 하이라이트가 아무리 건재해도 최소한의 바이러스 방어는 스스로 지켜야 하는 로우라이트가 필수다.

 

‘하이라이트 + 로우라이트 > 0’이기만 하면 괜찮다고??

기업이나 조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펜데믹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닝 서프라이즈를 실현하면서 깜짝 실적을 발표하는 회사들이 참 부럽기만 하다. 거기에 허황된 꿈이라는 지적질을 극복하고 나날이 성장하고 발전하여 세계 3위의 부자로 등극한 테슬라의 머스크 회장 같은 하이라이트는 놀랍기만 하다.

흔히들 사람들은 이런 하이라이트에만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실적 상승률이 얼마나 되고 영업이익이 얼마나 향상됐으며, 배당이 얼마인지에 대해 귀추를 주목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기업을 매수하여 합병을 하거나, 집 뒷마당 차고에서 출발한 스타트업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어마어마한 거액에 팔렸다는 소리도 연일 화제다. 초기에 두 명이 마주 앉아서 일하던 기업이 불과 수년 만에 수천 수만의 구성원을 둔 기업으로 성장하고, 글로벌 주요 도시마다 지점을 내는 것도 화려해 보인다.

반면에 사람들은 조직의 로우라이트는 일시적인 것이나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치부하고 감추기에 급급하다. 매출이 감소하거나 매출은 증가하는데도 이익이 줄어들 때가 있다. 제품에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기고 판매를 하거나, 든든히 조직의 허리가 되어야 할 직원들이 소리소문 없이 빠져나가는 일도 있다. 거기에 더 이상 혁신하기를 거부하고 앉은 자리만을 고수하려는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의 문제를 드러내고 공유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만연한 조직들이 의외로 많다.

겉으로 드러난 하이라이트를 강조하기에만 급급해하고 잠식해오는 로우라이트는 애써 거부하는 모습은 개인이나 조직이나 본능적인 모습에는 별 차이가 없다. 때로는 하이라이트가 로우라이트를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치부할 때도 많다. 그저 하이라이트는 더하기의 요소로 작용하고 로우라이트는 하이라이트와의 전체 합산에서 빼기 요소라 생각해서 퉁 치면 그래도 남는다고 안심하는 곳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바닥이 드러났을 때 쓰레기를 치우자’는 슬로건을 주장했던 곳이 있었다. 회사가 수출을 비롯해서 매출이 쌓이고 통장에 동그라미가 넘쳐날 때는 여기저기 삐걱대는 문제들이 있어도 그냥 대충 넘어갈 수 있다. 여론도 조직 내부에 문제가 있어도 어닝서프라이즈를 달성하면서 소위 ‘잘 나간다’고 포장하게 된다. 본 업과 상관없이 특별한 전략도 조직 내부의 컨센서스도 없었지만 호경기 덕분에 투자 금액이 늘어나도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세계경제가 휘청 하고 한번 흔들리고 나니,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수도 없이 투자했던 돈들은 오뉴월 땡볕 아래 아스팔트에 뿌려둔 물처럼 순식간에 증발했다. 돈 있을 땐 친구처럼 ‘내 돈이라 생각하고 갖다 쓰라’고 권유하던 금융권은 순식간에 날이 시퍼런 낫을 들고 서있는 저승사자로 돌변했다. 잘 나갈 때 흥청망청 접대비 써대면서 엉뚱한 프로젝트나 일삼던 귀한 몸들은 핫바지에 방구 새듯 줄줄이 빠져나갔고, 잘 나갈 땐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직원들만 남아서 무너지는 조직의 천장을 힘들게 더 받치고 있었다. 잘 나갈 때 호령하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희생하는 그 조직원들에게 여전히 다그치고 쏘아대는 독설이 날아다녔다. 내부에 공유되는 정보가 없어 여론에 기사로 나오고 나서야 직원들이 그 소식을 접했다.

얼마 안 가서 그 큰 조직은 주인 없는 회사로 탈바꿈했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갔다. 하이라이트는 우릴 잠깐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그 동안 사소한 것들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해온 로우라이트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준 것들이다. 로우라이트를 간과하게 되면 결국 갈 곳은 하나뿐이다. 성적이 중요해서 화재 경보가 울리 것에도 책상에 앉아 있기를 강요 받는 곳, 코로나를 조심하라고 마르고 닳도록 경고가 나돌아도 조심성 없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 삶의 요소를 조금 빼는 것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과 같다. 조직도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