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를 쉴 새 없이 헤엄쳐 움직이던 파도가 어느 한순간 잠잠해진다. 파도의 안식처이자 바다의 집인 석호(潟湖)가 파도를 맞는다.

그 어미 같은 석호는 지친 파도에 맑고 잔잔한 눈동자로 따뜻한 숨을 불어넣어 주고 파도가 갈 수 없는 육지의 길을 비춰준다.

그리고 안식처 위로 해가 뜨고 지면 오랜 여행에 지친 파도는 그곳에서 휴식을 얻어 다시 바다의 품으로 돌아간다.

강원도 고성에는 송지호와 화진포라 불리는 커다란 석호(潟湖)가 두 군데 있다.
지구의 역사와 같이한 석호는 수천수만 년 빙하기와 간빙기 등을 거치면서 상승과 연안부의 침수 그리고 파도가 밀어올린 토사가 둑이 되어 바다를 둥그러니 감싸 안으면서 형성됐다.

동해안에 석호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호수는 송지호, 화진포를 비롯해 영랑호, 청초호, 광포호, 매호, 향호, 경포 등 8개다.

그러나 상당수 석호들이 개발과 오염에 밀려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이 중 송지호와 화진포는 석호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호수다. 화진포는 그나마도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송지호는 덜 알려진 곳이다.

해질 녘 호숫가는 온 세상이 붉은빛-송지호
지난 주말 진부령의 굽잇길을 넘어 송지호를 찾았다.

송지호는 호수가 아니라 해수욕장을 일컫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을 정도로 여름철에는 피서 인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석호인 송지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송지호해수욕장 맞은편에 위치한 호수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철새탐조대가 눈에 띈다. 조형적인 건축미를 뽐내는 탐조대는 철새들의 생태를 소개하는 전시물로 가득 차 있다.

탐조대 뒤에 마련된 탐방로를 따라 호숫가로 나서자 하늘에 번져 오른 일몰이 호숫물에 그대로 붉은 물빛을 풀어낸다.

그 붉은 수면 위로 구름이 수를 놓고, 해당화가 부끄러운 붉은 속살을 살포시 내비친다. 은은한 호수 위로 강렬한 빛을 받으며 지친 여정을 마무리하는 파도가 스르르 밀려든다.

송지호는 이름처럼 송림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으며 면적이 약 20만평에 호수 둘레 4km로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어느 석호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송지호에 전설 한 토막쯤은 있어야 제맛. 조선 초기인 1500여년 전 송지호는 비옥한 땅이었으며 정거재라는 고약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맹인 부녀가 동냥을 위해 정부자 집 문을 두드렸다가 흠씬 몰매만 맞고 쫓겨났다. 마침 길을 지나던 고승도 이들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 정부자 집을 찾았다가 시주걸망에 쇠똥만 가득 담아 나와야 했다.

이때 고승이 문간에 있던 쇠절구를 금방아가 있는 곳으로 던지자 물줄기가 솟아올랐고 삽시간에 집과 문전옥답은 물에 잠기고 정부자도 물귀신이 되고 말았으며 지금의 송지호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탐방로를 나와 3층 규모의 예쁜 전망대에 올라 호수의 전경을 내려보는 맛도 일품이다. 왼쪽으로 저 멀리 설악산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정면에는 호숫가 위에 자리한 아담한 정자가 운치 있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서울에서 휴가를 왔다는 최영일(45) 씨는 “매년 송지호 해수욕장을 찾았는데 바닷가 옆에 이런 아름다운 석호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며 “우리나라도 잘 살펴보면 아름답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여행지가 너무 많아 해외로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송지호는 갯터짐을 통해 민물과 짠물이 만난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니 송지호에는 도미, 숭어, 황어, 잉어, 가물치 등이 함께 산다.

짠물이 섞여 겨울에도 잘 얼지 않고, 잡아먹을 물고기도 지천이니 철새에겐 이보다 좋은 쉼터도 없을 것이다.

겨울이면 송지호는 한반도 해안선을 이정표 삼아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던 겨울 철새가 머물다 갔다. 청둥오리 기러기떼와 천연기념물인 고니가 호수로 날아들어 장관을 연출한다.


화진포의 성 등 천혜의 자연 별장-화진포
송지호를 지나 거진에 이르면 과거 명태잡이로 유명한 거진항을 만난다. 명태 주산지답게 철마다 별미음식이 다양하다.

화진포는 여기서 10분 거리다. 화진포는 바다도 넓고 호수도 넓다.
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인 화진포 호수는 그 면적이 72만평. 호수와 바다가 뿜어대는 경승은 지금보다도 일제 때가 더 유명했다.

해방 후 북한 치하에선 김일성이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건물을 별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 한국전쟁 후 남한 땅이 된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이 호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방향으로 별장을 지었을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김일성 별장은 지금 화진포의 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김일성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호수 밖으로는 화진포해수욕장이 길게 누워 있다. 8년 전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준서(송승헌 분)가 죽음을 앞둔 은서(송혜교 분)를 업고 걸었던 곳이다.

화진포 백사장은 눈부시도록 희다. 파도가 훑고 지날 때면 ‘사르르~’ 맑은 소리를 낸다. 《택리지》를 쓴 조선시대 문인 이중환은 이를 ‘우는 모래, 명사(鳴砂)’라 했고, 여기서 명사십리란 말이 나왔다.

해수욕장 끝쪽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금구도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여행메모

가는 길
서울에서 양평, 홍천, 인제 용대리를 지나 진부령을 넘어 간성에서 우측 속초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송지호다.

화진포는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24km쯤 올라가간다. 또 최근 개통한 서울~춘천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춘천IC에서 중앙고속도로 원주 방향으로 가다 홍천IC 나와 인제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시간은 고속도로가 절약되지만 통행료는 만만치 않다.

볼거리
최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으로 금강산관광 재개 움직임이 일면서 금강산의 길문인 고성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남쪽의 최북단인 통일전망대는 저멀리 북한의 해금강과 금강산을 조망할 수 있어 가볼 만하다.

또 송지호 뒤쪽에는 전국 최초로 지정된 전통마을인 왕곡마을도 들러볼 만하다. 거진항, 대진항을 비롯해 청간정, 건봉사 등 고성에는 빼어난 절경들이 즐비하다.

송지호ㆍ화진포(고성)=글ㆍ사진 아시아경제신문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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