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숨이 턱 막히고 아득해졌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노 대통령 서거일을 이같이 회고한다.

김 전 장관은 철원 민통선 농민들과 유기농 농법을 논의 중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비보가 명치 끝을 찔렀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인동초’ 김대중 전 대통령을 뒤흔들었다. 김 전 장관이 지난 3월 동교동 김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는 비교적 정정한 모습이었다.

대통령 부부는 접견실에 나란히 앉아 김 전 장관 내외를 반겨주었다.
김성훈 전 장관이 주로 대화를 이끌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종종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김 전 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을 이같이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초등학생 시절 조우한 청년 김대중은 역동적이었다.

“한 남자가 리어카를 끌고 갔어요. 어린 나이에도 뭐 하는 사람일까 싶었는데, 남자가 마이크를 들었어요. 그리고 연설을 시작했지요.” 그가 젊은 시절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리어카를 밀던 여자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김 전 장관이 김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였다. 국민들을 상대로 사자후를 토해내던 정치인 김대중은 사라지고 늙고 병든 노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을 즐겨 부르던 노(老)대통령도 세월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8일 영면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성훈 전 상지대 총장을 20일 만나, 전남 신원군 하의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사의 물줄기를 바꾼 대 정치인의 인생역정을 되돌아 보았다.

지난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늙고 지쳐 보였습니다.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늙고 지쳐 보였으며, 무기력해 보이고… 그 표현이 참 적절합니다.

김 전 대통령이 오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높이 날아오른 용은 후회하기 마련인가요.
김대중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잃어버린 것들이 많습니다. 장남이 고문 후유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자신도 한쪽 다리가 불편합니다.

백주대로상에서 납치돼 수장될 뻔했고, 사형선고도 받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가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민주주의적 가치의 훼손이었습니다.

지난 3월만 해도 만약의 사태를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죠. 당시 대통령 부부를 직접 만나보셨죠.
저희 부부가 동교동을 찾을 때만 해도 비교적 정정하셨어요. 동교동 자택에 들어가니 이희호 여사와 나란히 저희 부부를 맞이하셨습니다.

제가 발표한 책에도 관심을 피력하셨습니다. 당시에도 일주일에 두 차례 ‘투석’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며 영면하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졌고, 부쩍 침울해지셨다고 하죠.
본인이 평생에 걸쳐 구축한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지켜줄 젊은 정치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비통할 만도 하죠.

빈소에는 언제 다녀오셨습니까.
오늘(20일)도 새벽 1시까지 빈소를 지켰습니다. 다들 국민의 정부 시절을 회고하며 웃고 떠들다가도 분위기가 또 숙연해지고 그랬죠. 평생의 라이벌이자 정적이던 박 전 대통령의 딸 근혜 씨도 다녀갔습니다.

두 분의 인연이 꽤 오래됐다고 들었습니다. 영정사진을 보니 만감이 교차하지 않던가요.
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고향의 봄’을 부르던 그분의 모습도 떠오르고… 김 대통령은 딱 한 가지 노래만 불렀어요.

술이 한잔 얼큰하게 들어가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이 가곡을 불렀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제가 하루는 대통령에게 만날 똑같은 노래만 부르냐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물끄러미 보시면서 어렸을 때 부잡하다는 말을 안 들었냐고 하시더군요.

호남 사투리로 번잡하고 활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스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건 언제였습니까.
초등학교 시절이었어요.(웃음)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멀끔히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리어카를 끌고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어요. 젊은 여자가 뒤에서 그 리어카를 밀고 있었죠. 이 남자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여자분이 지금은 타계한 첫 번째 부인이었어요. 마이크를 실은 리어카는 이동식 연단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의 눈에도 리어카를 끌던 남자가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중앙대 교수로 부임한 뒤에도 유세 현장을 찾아다니셨다고요.
김 대통령은 말이 곧 글이었습니다. 그가 터뜨리던 사자후가 지금도 귓전을 맴돕니다. 맨 앞자리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대학 교수가 바로 저였어요. 말 그대로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그 꼬마가 국민의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됐어요. 김 대통령은 용인의 기준도 독특했다고 하죠.
김대중 대통령이 사람 뽑는 방법을 소개하면 깨끗하고 말끔한 사람, 예쁘장한 사람을 선호했어요.

김명자, 박선숙, 한명숙 씨가 다 예쁘지 않았습니까. 장관들도 이목구비가 정상적이고 단정해야 썼습니다. 넥타이도 잘 매야 하고, 면도도 잘해야 하고, 머리도 단정해야 했지요.

“김 대통령은 딱 한 가지 노래만 불렀어요. 술이 한잔 얼큰하게 들어가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이 가곡을 불렀어요. 가난한 농민으로 평생을 살다간 아버지, 어머니가 농사를 짓던 고향산하가 늘 그리운 거였겠죠.”

까다로운 리더는 아니었습니까.
농림부 장관 시절은 정말 혹독했습니다. 힘들어서 더 이상 장관직을 감당할 수도 없어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사직서를 안 받아줄까 봐 치과 증명서까지 첨부했습니다. 이가 많이 빠졌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가 뭉텅이로 다 빠집니까.
2년 반 동안 이가 무려 13개나 빠졌어요. 9개가 조금씩 흔들거리더니 말 그대로 뿌리째 뽑혀 나갑디다.

균형이 무너지니 다른 4개가 같이 빠지더군요. 당시 임플란트 비용으로만 정말 에쿠스 자동차 한 대 값이 들어갔어요. 제 입속에 에쿠스 자동차 한 대를 집어넣은 셈입니다.

재경부 장관도 아니고 농림부 장관이 할 일이 그렇게 많았습니까.
김 대통령은 농업 문제는 경제 논리로만 풀 수 없다는 신념이 확고했어요. 제가 경제부처 수장들과 다툴 때면 측면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농림부 장관은 농민들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자리라는 소신이 뚜렷했습니다. 농민들의 개인 연대보증을 없앤 것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한 마을 사람들이 야반도주를 하는 등 큰 사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외환위기 직후 달러값이 급등하지 않았습니까. 다국적기업들은 이 틈을 파고들며 사료나 비료가격을 올렸습니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많은 빚을 지고 야반도주한 농가들이 많았어요. 연대보증으로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깨보증’이라는 개인연대보증을 섰거든요. 국가가 신용보증해야 한다고 (제가) 경제수장들을 설득했습니다만 역부족이었죠.

누가 그렇게 반대하던가요.
처음에는 신용보증 자금으로 2000억원을 요구했어요. 그런데 정말 씨알도 먹히지 않더군요. 그래서 다시 1000억원으로 요구사항을 낮췄습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반대의 선봉에 있다 보니 역부족이었어요. 너무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기도 해서 책상을 치고 퇴장해 버렸어요. 그런데 이 에피소드가 아마도 대통령 귀에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김 대통령은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풀었습니까.
대통령이 사흘 뒤 국무회의를 주재하다 ‘어깨보증’의 폐해를 거론하셨어요. 전라남도 나주 동광면, 그리고 진주의 한 마을에도 농민들이 잇달아 야반도주를 했다는데,
농림부 장관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요. 정말 사흘 전 일을 보고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만, 꾹 참았죠.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네요.
정말 벌떡 일어나서 관계 장관들과 협의해 대책을 보고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다른 장관들은 불만들이 많았죠.

당신이 고자질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였죠. 진념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에게 회의를 요청하니 회의는 무슨 회의냐고 하더군요.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이 됐습니다.

농업분야 단체들을 통폐합할 때 그 반발이 당시에도 만만치 않았을텐데요.
제가 ‘화형식’을 두 번 당했습니다.(웃음) 농협·축협·인삼협동조합이 통합될 때 축협 회장이 국회에서 할복 소동을 벌였습니다.

우리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도 꼬리를 물었습니다. 축협은 결사대를 결성하고요. 김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도 저를 변함없이 지지해 주었습니다.

농업 관련 단체들을 통폐합하고, ‘수세’를 폐지한 이면에는 리더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군요.
대통령은 매우 흐뭇해하셨어요. 수세를 폐지했으니 농민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냐는 것이었죠.

또 농협·축협·인삼협동조합을 하나로 통폐합했으니 월급도 한 명에게만 주고, 사무실도 하나니 돈을 절약할 수 있어 얼마나 좋냐고 하셨어요. 그리고 큰일을 했으니 선물을 하나 주시겠다고 했어요.

김 대통령이 무엇을 주시던가요.
박연차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휴켐스가 바로 산자부 소유 남해화학에 속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이 알짜배기 회사를 농협에 넘겨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돈을 장기분할 상환으로 지불하라고 하셨죠. 농협은 이 회사로 벌떡 일어났어요.

‘농업은 경제논리로만 풀어갈 수 없다’는 김 대통령 평소의 소신을 재차 보여준 겁니까.
그는 농민들의 고통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었어요. 농업 기반을 튼튼히 닦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어요.

자신이 아마도 농민들을 잘 아는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죠. 다음 대통령은 젊고 도시지향적인 인물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거죠.

동아그룹에 얽힌 비사도 흥미롭습니다.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이 김포 매립지를 상업용도로 전환해 달라는 요청을 줄기차게 했습니다.
당시 김종필 총리가 최원석 씨의 아버지와는 부여 동향으로 막역한 사이였어요. 김종필 총리마저도 용도 변경을 해줄 수 없느냐고 물어볼 정도였지요.

하지만 정태수가 연루된 수서비리보다 더 큰 폭발력이 있는 사안이라며 (제가) 대통령께 절대 불가를 진언했고, 대통령이 이걸 수용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리비아에서 큰돈을 번 최원석 회장이 왜 매립지에 관심을 두는지 물어보았죠.

“초등학교 시절이었어요.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멀끔히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리어카를 끌고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어요. 젊은 여자가 뒤에서 그 리어카를 밀고 있었죠. 이 남자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었어요.”

김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역시 북한에 쌀과 비료를 지원한 ‘햇볕정책’인데요. 주관부서가 농림부 아니었습니까.
대통령이 하루는 저를 갑자기 불렀어요. 그리고 북한에 비료를 얼마나 보낼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2000년 봄입니다.

남북한 정상 회담을 앞둔 시기였지요. 당시 유기농 농가가 늘다 보니 비료 소비가 과거에 비해 큰 폭으로 줄었어요. 비료 지원은 이 문제를 풀 ‘묘책’이었죠.

북한에 비료를 얼마나 보냈습니까.
20만t을 보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북한은 밭농사가 중심이니 밑거름과 윗거름을 통틀어서 최소 이 정도가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얼마 후 박재규 통일부 장관이 농림부가 북한에 보낼 비료 10만톤을 준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6월인데도 이상하게 비가 많이 내렸어요. 제가 남해화학에 내려가서 북한에 실어보낼 비료 준비작업을 했습니다. 극비 사항이었죠.

다른 장관들은 다들 역사적인 6·15 정상회담 현장에 갔는데, 농림부 장관만 비료를 준비하느라 참석을 못했어요. 억울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날 북한 남포항에 도착한 비료들은 모두 제 손때가 묻어 있습니다. 6월에 비가 많이 내려 혹시나 녹을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또 남해화학 대신 적십자사 마크를 붙여야 했습니다. 억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웃음) 역사의 거름 역할을 한 거죠.

농림부 사람들이 다들 남쪽에 있다 보니 예기치 못한 에피소드도 터져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자꾸만 ‘닭공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대통령을 수행한 각계 전문가들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거죠. 정세현 씨가 알겠습니까, 아니면 재정경제부 장관이 알겠습니까.

김 대통령은 쌀 지원 문제를 어떤 식으로 풀었습니까.
당시 쌀은 공급과잉이었습니다. 정부는 WTO 협정으로 쌀 수입량을 해마다 늘려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쌀 소비량은 점차 줄어들고 공급은 늘어서 수급 불균형이 ‘골칫거리’였죠. 이 잉여분의 쌀을 북한에 보내주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국내산은 우리가 먹고, 1~2년 정도 지난 묵은 쌀은 북한에 보내며, 수입분은 맥주·과자·식혜 등을 만들자는 거였죠.

하지만 당시 북한에 대한 쌀 지원은 두고두고 ‘퍼주기식’ 지원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까.
남는 쌀을 북한에 보내 수급 불균형을 해소, 가격안정을 꾀할 수 있었죠. 또 굶주리는 북한 사람들을 인도주의 차원에서 도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수단이었습니다.
공짜로 지원한 것도 아닙니다. 미국이 과거 남한에 쌀을 지원한 전례를 참조했습니다. 30년 분할상환 방식으로 북한에 쌀을 지원한 배경입니다.

현 정부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북한이 일단 고개를 숙여야 인도적 지원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이 아닌가요.
전국에 쌀 재고가 넘쳐서 지금도 쌀값이 바닥입니다. 추수도 또 다음 달이어서 가격 폭락도 우려됩니다.

보수진영에서는 북한의 인권을 왜 거론하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바로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형제가 굶는 것을 방치하면서 인권을 거론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김 대통령의 남북관은 바로 그 지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두 거목이 잇달아 영면했습니다. 두 분의 서거를 계기로 현 정부가 바뀔 것으로 보십니까.
북한 조문특사 파견을 계기로 이명박 대통령이 좀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시장 시절, 두 차례 그를 독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서민·중도 행보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봅니다. 대통령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치고 있는 ‘고소영’들이 문제라고 봅니다. 대통령은 충분히 바뀔 수 있는 분입니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