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전경

미국 흑인 음악의 대표적인 여성 스타 티나 터너는 스위스 취리히의 부촌인 골트퀴스테에 살고 있다.

미국 중서부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난 그는 1960년대 ‘아이크와 티나 터너’라는 이름의 부부 듀엣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1984년 솔로 앨범 ‘프라이빗 댄서’로 재기한 뒤 86년 스위스 취리히에 정착했다.

스위스의 외국인 부유층에 대한 세제혜택 때문이다. 하지만 터너도 앞으로 엄청난 세금을 내야 할지 모른다.

스위스 취리히 주민들은 2월8일 주민 투표에서 부유한 외국인에게 부여해 온 이른바 ‘불공평’ 세제혜택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찬성한 유권자는 약 21만6000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52.9%를 차지했다.

스위스는 그동안 외국인 부호들로부터 정액세를 거둬왔다. 스위스 내 부동산 연간 임대료의 5배 정도였다. 하지만 억만장자들에게 이는 면세나 다름없다. 스위스 정부는 사실상 이들의 정착을 지원해 온 셈이다.

그동안 러시아의 재벌 빅토르 벡셀베르크, 독일 생활용품 제조업계의 거물 테오 뮐러 같은 세계적인 부자들이 취리히에 많이 거주했다. 하지만 특별 대우를 받았던 억만장자 외국인 137명에 대한 세제혜택은 이번 투표로 사라질 듯하다. 이들도 여느 스위스 국민처럼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야 할 판이다.

많은 외국인 억만장자가 곧 다른 나라로 이주하게 될지 모른다. 이들 억만장자가 스위스를 떠남으로써 잃게 되는 손실이 세수보다 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세계적인 회계 컨설팅업체 KPMG에 따르면 2006년 스위스로 이주한 사람은 4175명이다. 2003년의 경우 2394명이다. 대다수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번 투표 결과로 취리히가 얻게 될 추가 연간 세수는 2000만스위스프랑(약 262억원)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KPMG의 요르그 볼커 애널리스트는 세수 감소 문제와 관련해 “외국인 부자가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스위스 현지 업체가 경기침체 및 자금난으로 세금을 덜 내려 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볼커 애널리스트는 이번 투표 결과가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향후 수년 동안 지속될 것으로 본다. 스위스는 그동안 부유한 외국인 여행객의 증가로 짭짤한 재미를 본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컨설팅업체 미셸루앤컴퍼니의 프랑수아 미셸루 대표는 “스위스 유권자들이 자살 골을 넣고 좋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취리히에서 이런 투표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미셸루 대표는 “유권자들이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수입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라며 “금융위기로 국가 재정이 어려운 지금 이번 투표 결과는 자해처럼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스위스에서 외국인 부유층에 대한 과세 문제는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 이후 스위스 경제 사정이 크게 악화하자 부유층은 ‘인기 없는 유명인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취리히 인근 스위츠주의 크리스티앙 바너 재정 담당관은 “지난해 금융위기 속에서도 엄청난 보너스를 챙긴 은행 경영진으로 인해 여론이 매우 나빠졌다”며 “부유층에 대한 이미지가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고 전했다.
아시아경제신문 노종빈 기자 (unti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