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들어 현대그룹은 바쁘다. 숙원사업이 된 현대건설 인수에 성공해야 하고 지난해 ‘총기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중단된 대북사업도 재개해야만 한다. 수면 아래에 있지만 현대가(家)로부터의 ‘경영권 방어’도 여전히 과제 아닌 과제다.

때문에 취임 6년째를 맞이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어깨는 유독 무겁다. 특히 2009년은 그룹 차원에서 34조원 매출을 달성하겠다고 선포한 ‘비전 2012’의 기반을 쌓는 중요한 해이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숙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숙제1
주가조작’ 암초 피해갈까
최근 현 회장은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다. 지난 2007년 말께 불거졌던 ‘현대상선 주가조작 의혹’이 최근 검찰의 재수사 방침이 알려지면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현대증권 노동조합은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과 현 회장의 친척이 운영하는 건설사 등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100억원대의 차익을 챙겼다”며 서울중앙지검에 현 회장 등을 상대로 고발한 바 있다.

고발장을 통해 현대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피고발인들은 2006년 초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을 놓고 현 회장 측과 현대중공업 측이 경영권 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현대그룹 측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우호지분을 확보하거나 자사주를 매입한다는 내부정보를 사전에 흘려 주식투자에 활용하면서 차익을 챙겼다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현대상선 주가는 ‘경영권 방어책’이 나오기 직전인 2006년 9월, 1만8000원대였지만 우호지분 확보와 자사주 매입방안이 공개된 이후인 2007년 5월, 6만원대로 3배 이상 급등했고 이 과정에서 현 회장 친척이 10억여원, 현 회장 친척 관련 건설업체가 70억여원, 현 회장의 딸 정지이 전무는 수천만 원 등의 시세차익을 올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대증권 노조 측은 이후 고발을 취하했고 그로 인해 수사는 중단됐다.

그런데 최근 검찰이 다시 고발인들을 불러 고발 경위와 내용을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현 회장을 향해 ‘화살’이 간접적으로 겨눠지고 있다. 검찰의 수사팀 한 관계자는 “수사 인력이 부족해 미뤄두다가 이제 고발인 조사를 하는 단계”라며 “노조 쪽에서 일부 고발 내용을 취하하긴 했지만 취하 여부와 상관없이 의혹 부분을 살펴볼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주가조작 의혹 사건’은 현 회장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룹 관계자는 “현대증권 노조의 고발내용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2007년 4월 말 현대상선의 자사주 매입공시 이후 5월 주가가 급등해 혹시 여기에 불순한 세력이 개입된 게 아닌가 의문이 생겨 현대상선이 직접 금감원에 의뢰를 했다. 이에 금감원이 조사했고 모든 거래내역을 조사했지만 혐의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금감원으로부터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숙제2
외아들 정영선 ‘후계자’ 합류하나
현 회장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각 중 작년 하반기부터 대두되고 있는 것이 후계구도 얘기다.
외아들인 정영선(24) 씨가 작년 8월 현대택배의 현대투자네트워크 보유지분 4만주(20%)를 매입한 것을 두고 “본격적인 후계 구도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많아진 것이다.

특히 고(故) 정주영 회장의 손자인 ‘선(宣)’자 돌림 3세들이 이미 상당 부분 경영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탓에 현 회장이 영선 씨에도 이제 서서히 계열사의 지분매입을 통해 경영권 이양을 위한 기초작업을 펼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대세다.

공익근무를 마친 후 미국 유학 길에 오른 정영선 씨를 둘러싼 후계구도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지분을 매입한 현대투자네트워크가 현대건설 인수작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견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분매입이 소액(2억원)이지만 영선 씨의 지분율이 20%로 현대택배의 2대 주주로 올라섰고 현대상선과 함께 현대계열사 2곳의 지분을 확보해 향후 경영 참여에 대한 발판은 마련했다는 얘기다.

이 같은 평가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현대투자네트워크는 지분상 계열사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경영자문을 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제조업이라든가 하면 추측할 수 있겠지만 소규모의 컨설팅 기업이 핵심업무를 맡는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반박했다. 또 현대그룹은 “영선 씨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그룹 내 지분율도 미미한 수준이라 승계구도가 가동됐다는 해석은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포스트 현정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번 영선 씨의 지분매입은 어찌됐든 현 회장의 ‘후계 구도’를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대유엔아이에서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누나 정지이(32) 현대유엔아이 전무와 함께 현 회장의 뒤를 이은 ‘후계자 구도’에 정영선 씨가 본격 가세했기 때문이다.

숙제3
현대아산 대북관광 ‘부활’하나
무엇보다 현 회장이 올 들어 가장 큰 해결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대북 관광사업이다.

지난해 7월 남측 관광객 총격 피살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수개월째 영업이 중단된 상태라 주관사인 현대아산의 직원 규모도 기존 1000명 선에서 절반도 안 되는 400명 선까지 축소되는 등 ‘긴축경영’ 국면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 사태 속에서도 10만명 이상 꾸준히 관광객을 늘려오던 개성관광마저도 중단됐다.

특히 대북 관광사업의 경우 경직된 남북관계부터 풀려야 재개의 여지가 있어 딱히 현재로선 마땅한 ‘방북 카드’를 쓸 수도 없는 처지다.

때문에 현 회장은 정치적인 상황과 별개로 그룹 차원에서 관광재개를 위한 ‘묘수 찾기’에 나서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대북사업에 위기를 겪던 지난 2007년 11월 직접 북으로 건너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개성관광, 백두산 관광, 비로봉 관광을 이끌어낸 전례가 있는 만큼 올 한 해 현 회장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현대그룹 측은 현재 대북사업의 정상화 이후에 초점을 맞춰 사전 고객 잡기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혹시나 관광이 재개될 것에 대비해 지금부터 금강산 관광상품의 예약 판매를 실시하고 있다. 기존 상품 가격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를 만들어놓고 있는데 현대그룹 측은 “꽤 반응이 좋다”는 입장이다.

숙제4
현대건설 인수 성공할까
현대그룹의 숙원사업이자 범 현대가와 일전이 예상되는 ‘현대건설 인수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현 회장에게 2009년을 숨가쁘게 만들고 있다.

아직 M&A 매물 시점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미 현대그룹 측은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사전 작업을 끝냈다는 입장이다.

현대그룹 홍보실의 김홍인 부장은 “현대그룹만큼 현대건설 인수작업에 많은 준비를 한 기업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지난 2002년부터 현대그룹은 다각도로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준비작업에 만전을 기해왔다. 인수자금 역시 계열사의 증자 등을 통해 이미 확보돼 있어 매물 시기만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은 일각에서 얘기되는 ‘현대가의 적통(嫡統)’을 잇는다는 것 외에 그룹경영의 안정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인수가 성사되면 이미 사업권을 획득한 북한 내 SOC(사회간접자본) 조성사업뿐 아니라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 등 전 계열사의 사업과도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데다 건설과 제조가 주축이 된 인프라 사업 부문, 해운과 택배를 중심으로 한 통합 물류사업 부문, 증권이 중심이 된 금융서비스 사업 부문 등 3대 사업축으로 그룹의 시스템을 정비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주력계열사인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현대건설 인수는 현 회장에겐 ‘필요조건’이다.

문제는 현대가(家)와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현재 현대상선 지분 22%를 보유한 현대중공업 등 현대가에서 현대상선 지분 7%를 보유한 현대건설을 인수해 현대그룹 경영권마저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박스

현 회장 ‘자신감 경영’ 왜?

스스로 주문걸고 직원 기 살리고

“자신 있습니까?”
현정은 회장의 올해 경영화두는 ‘자신감 경영’이다. 그는 올 초 신년사에서 “누군가 ‘자신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자신 있습니다’라고 즉각 외칠 준비가 되어 있는 ‘현대맨’이 되어달라”고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이후부터 서울 종로구 적선동 현대상선 빌딩 주변 식당가에서는 저녁 무렵이면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습니다”라는 외침소리가 유난히 많다고 한다. 현대상선을 비롯한 현대그룹 직원들이 회식자리는 물론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자신 있습니다”를 연일 외치기 때문이다.

현 회장의 이 같은 ‘자신감 외침’은 왜일까.
전반적인 경기침체 등으로 고개 숙인 직원들의 ‘기(氣) 살리기’ 차원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현대그룹만의 특수한 사정을 크게 고려한 ‘액션’으로 보인다. 믿었던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이 지난해 좌초된 이후 뜻대로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어 자칫하다간 전 계열사 직원들의 사기마저 떨어질 수도 있음을 걱정한 것이다.

또 올 들어 헤쳐나가야 할 숙제가 많은 만큼 ‘강한 자신감’을 피력함으로써 스스로 주변의 어떤 도전에도 끄떡없이 버텨내겠다는 ‘주문’ 차원일 수도 있다.

김진욱 기자 action@ermed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