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송원제 기자)


생산·유통·가공 일관체계 완성… 교육·관광 테마파크 더 큰 꿈

낭만만으로는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없다. 원하는 길을 택한 순간 가까운 사람들의 외면에 외로운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을 꺾지 않고 올곧이 한 길을 걸으며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면, 고독한 싸움의 승자가 될 날이 있다. 긴 터널을 뚫고 원하는 목표와 당당히 마주선 승자의 얼굴에 드러난 여유가, 지난날의 노고를 담고 깊이 패인 주름마저 빛나게 하는 50대. 젊은 시절부터 착실히 인생 2막을 준비해 만족한 삶을 사는 ‘매실장인’을 만나봤다.

서명선(55) 대표는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에 낙동강을 끼고 펼쳐진 2만여 평 규모의 매실농원 소유주다. 현재의 매실 농장과 공장을 갖추고 매실 가공품을 생산할만큼 자리잡기까지 송광매원에는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반영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젊은 시절 대구 매일신문에 신문 기자로 취직한 서 대표는 44세까지 한 직장에 몸 담고 있었다. 일하는 와중에도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한 덕에 남들보다 빨리 승진을 했다. 그 때까지도 서 대표는 별다른 위기 의식 없이 지냈다. 그러나 1997년 터진 외환위기 사태가 당시 직장인들을 정리해고의 수렁으로 몰고 가자 서 대표와 직장 동료들 사이에도 불안감이 번졌다.

서 대표는 그때부터 ‘평생 직장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됐다. 봉급 생활자의 경우 아무리 고위직까지 승진하더라도 정년퇴직 후 20~30년은 할 일이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서 대표는 신문 기자로 재직하던 당시 접했던 많은 사업 아이템을 토대로 일식집을 경영하기로 마음 먹었다. 당시 일식이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감히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대구에 초밥과 퓨전 일식 메뉴를 위주로 한 일식집을 열었다.

그의 첫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개업과 동시에 북적이던 손님은 나날이 늘어 그는 곧 2호점을 열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대구·경북권에 8개의 체인점을 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찾아온 위기가 그의 사업을 가로 막았다.

서 대표의 가맹점에서 식사를 한 고객 30명이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 것. 몇 몇 가맹점에서 값싼 음식 재료를 쓰다 보니 일어난 사고였다. 이 사고로 대구 시내에 소문이 퍼지면서 서 대표는 궁지에 몰렸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맞는 최대 위기였다. 하지만 이미 퍼져버린 소문 때문에 매상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업을 되돌리기에는 무리였다. 서 대표는 눈물을 머금고 2년 만에 사업을 접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과거에 일본에 방문했을 때 음식집에서 맛보았던 우메보시가 떠올랐다. 우메보시는 매실과 자소(紫蘇)로 만든 일본 장아찌로 살균과 소화를 돕는데 탁월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서 대표는 매실의 조미료 기능과, 소화를 돕는 두 가지 기능에 매력을 느껴 각종 자료를 토대로 매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매실 재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귀농의 길에 접어들며 서 대표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생각보다 자본금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잘 다니던 직장을 두고 칠곡군으로 귀농하겠다는 가장을 만류하는 가족의 반응도 당연했다. 두 명의 자녀도 학교 문제로 도시에 거주해야 했다. 따라서 서 대표는 혼자 칠곡에 가서 살기로 결심했다. 잠시 동안 가족과의 이별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 일식당 직영 농장으로 쓰다가 방치했던 땅에 매실 묘목을 심자는 확고한 결심만이 서 대표를 움직였을 뿐이다.

낙동강 주변의 송광매원 농장 전경.


가공식품 개발에도 남다른 노력

서 대표의 매실 사랑은 남달랐다. 토종 매실을 보급하려던 권병탁 영남대학교 교수에게서 어렵게 매실 묘목을 얻어 칠곡 농장에 옮겨 심고 매실 모종을 만드는 법도 전수 받았다. 권 교수의 송광매원이라는 상호도 넘겨 받았다.

언론사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토종매실 홍보에도 힘썼고, 반품제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처음에는 남는 마진이 없었지만, 식중독과 같은 과거의 사고를 막기 위해 품질을 우선시했다. 점차 매실나무가 늘었고 밭의 면적도 넓어져 수확물도 덩달아 증가했다.

그러다 한 차례 고비가 어김없이 서 대표에게 찾아들었다. 이번에는 장독에 담가놓은 매실액의 유출 사고였다. 장독 불량으로 매실액이 전부 새는 것은 물론 햇빛 탓에 이상 발효 현상이 나타난 것.

이후 서 대표는 매실 초고추장을 만드는데 도전했다. 도입한 방법은 절인 매실의 과육을 잘게 으깨서 초고추장에 넣고 섞는 것이었다.

가공식품이 유통업계에 입점하기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서 대표의 매실 초고추장은 2001년 대구 시내 유명 백화점에 처음 입점했다. 송광매원이 국내 최초로 무농약 재배 품질 인증을 획득한 시기도 이와 같았다.

반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듬해 농수산식품부에서 주관한 ‘한국 전통식품 콘테스트 베스트 5 선발전’에 출전하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열린 제1회 전국벤처농업 투자 유치전에서도 ‘빅6’에 포함됐다.

이어 선보인 매실 김치도 2004년 ‘한국 전통식품 콘테스트 베스트 5 선발전’에서 수상했다. 여세를 몰아 대형 할인점에 입점시키자 서 대표에게 수출 문의가 쇄도했고, 세계 최고의 매실 산지로 알려진 일본 오오야마에서 개최한 매실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농수산홈쇼핑사에서도 방송납품 제의를 받았지만 생산공장이 없어 어려움이 있었다. 공장 설립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에 그 당시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업을 확대할 좋은 기회가 왔지만 공장신축 비용 문제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 기회는 또 한번 찾아왔다. 마침 농수산식품부가 국가 보조로 공장 설립 비용을 50% 지원하는 사업 대상자를 찾고 있었다. 농수산식품부는 우리 먹거리를 개발 보급한 송광매원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줬다.

드디어 2005년 송광매원은 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 서 대표는 그 동안 갈망해왔던 자신이 재배한 매실을 본격적으로 가공할 ‘꿈의 공장’을 설립할 수 있게 됐다.

‘꿈의 공장’을 갖게 된 서 대표는 토종 매실 홍보에 한층 힘을 쏟는다. 지역 매화축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은 물론 일본 매실박람회에서 한국 토종 매실 알리기 등 남다른 매실 사랑을 실천했다.

송광매원은 드넓은 농장과 더불어 가공품을 만드는 공장, 가공품을 파는 카페와 손님을 맞는 식당, 영업과 생산 관련 일을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사무실 등의 각 건물로 구성됐다.

봄, 여름, 가을에는 낙동강을 따라 늘어선 갈대숲과 각종 식물이 자아내는 경관이 일품이다. 또 매실 수확 시기인 7~8월에는 매실 열매가 열려 초록의 풍경을 연출해낸다.

자연탐구·영어 캠프 조성도 나서

서명선 대표가 매실 열매를 살펴보고 있다(맨 위). 송광매원 내 공장에서 직원들이 매실 가공품을 포장하고 있다(위).

서 대표는 이 같은 자연의 정취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다. 특히 송광매원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서 대표가 기획한 교육 프로그램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다.

가족이 다 함께 영어를 체험하는 영어 캠프로, 전문 영어 교사와 주변 미군 기지의 고학력 미군들을 교사로 초빙할 예정이다. 서 대표는 “자연 속에서 영어를 배우면 소재가 다양해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시골 방문은 일회성 방문이 대부분”이라며 “송광매원을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자연 탐구 생활을 위해 재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추진 중인 사업은 이미 지방자치단체장과 칠곡군청, 다문화가정이나 소외계층을 돕는 KT사회공헌팀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농수산식품부 산하 농업인재개발원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허가가 나면 오는 3월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할 예정이다. 현재 농원 내에 관련 시설을 공사중이다.

지역 농산물을 이용한 요리 체험장도 마련할 생각이다. 고객들이 농원에 와서 다양한 농촌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계획을 구상중인 것. 날씨가 따뜻할 때는 낙동강에서 카약과 요트, 낚시 체험도 할 수 있다. 송광매원이 단순히 매실 재배지가 아니라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다.

서 대표는 송광매원을 자신만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는다.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려면 초기 투자가 중요한 까닭에서다. 지금의 송광매원을 만들기까지 대출받은 비용도 많다. 그러나 서 대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앞날을 내다본다.

농원을 후손에게까지 대대로 물려주려는 계획에서다. 서 대표의 두 자녀도 전부 외식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식품가공업 학사 학위를 딴 둘째 자녀가 농업 경영에 관해 체계적으로 배우면 후계 농업인으로 키울 생각이다. 이제는 자녀들도 아버지의 사업에 대한 비전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한편 송광매원은 새로운 사업과 제품 개발에 투자하는 비용 탓에 연 매출 30억 원 대비 순 수익이 5억 원에 그친다. 미국, 중국,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에 수출하는 비중은 2억 원 정도에 달한다. 아직 서 대표의 계획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이만큼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데도 5년의 세월이 걸렸다.

따라서 투자의 가치는 올해부터 나타날 것이라는게 서 대표의 생각이다. 설비 투자가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고, 조직과 기술이 갖춰졌기에 올해부터 마케팅 전략을 강화해 전환점을 맞겠다는 포부다. 장차 목표를 매출 50억 원을 넘어 100억 원까지 바라보고 있다.

그간 서 대표는 꾸준한 투자와 개발로 매실 엑기스, 매실 고추장, 매실 초고추장 등과 더불어 자소 화장품, 자소 음료, 자소 비누 등을 개발했다. 현재 다이어트 매실 초고추장을 개발 중이며, 자체 연구소와 더불어 대학교 부설 연구소와 함께 새로운 제품군 개발에 나서고 있다. 지식경제부나 농수산식품부, 농업진흥청으로부터 R&D 과제에 대한 지원을 받기도 한다.

송광매원이 1년에 전국으로 유통하는 생과 매실의 양은 100여 톤. 송광매원에서 직접 재배하는 매실은 전체 출하량의 20%로 나머지 80%는 계약농가에서 재배한다.

서 대표는 앞으로 매실이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먹거리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추세인 만큼 “음식의 안전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그는 매실의 효능에 대해 자부심이 크다. 특히 국내 수요보다 해외 수요가 더 높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서 대표는 농장 경영이나 제2의 사업 구상 외에도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연 대표적 인물로 농협 연수원, 순천대, 경북대, 농촌진흥청 등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자신과 같이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는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경영 마인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귀농인들이 실패하는 이유로 부족한 자금과 현실성 없는 사업계획을 꼽았다. 그가 자신의 삶을 풀어 쓴 책 <귀농 경영>에서 사업계획서 작성 요령을 자세히 소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 대표가 말하는 경쟁력은 현실성을 가진 사업계획서에서부터 출발한다.

귀농 꿈꾸는 이들에 노하우 전수도

그는 귀농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단지 농사만 짓는 일에 국한되지 않고 2차 산업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귀농에 있어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6차 산업이다.

6차 산업이란 생산부터 가공, 유통, 농촌관광까지 농촌을 중심으로 전 산업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한 농업 종사자끼리의 협업이 귀농의 성공적 정착에 큰 도움이 된다는 부연 설명이다.

서 대표 자신도 매실 외에 미나리, 감식초, 오디 등 타 식품을 생산한다. 이를 생산하는 전문 업체와 손잡고 하나의 큰 조직체로 움직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한편 서 대표는 경제적인 성과 측면에서 자신의 삶을 ‘반쪽짜리 성공’이라고 여긴다. “농업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는 산업이 아니다”라며 “후대를 위해 오랜 세월 애정을 갖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 대표는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자연을 벗 삼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대도시에 거주할 때는 “계절 변하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그가 자연을 일구어 스스로 성장시킨 사업에 만족하는 이유다.

농지 선택을 위한 6가지 조언

■ 고향을 고집하지 않는다.
■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지역을 택한다.
■ 공장이나 기타 부대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 친환경농업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지역을 고른다.
■ 수자원 확보가 가능해야 한다.

백가혜 기자 lita@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