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25년 기자 생활 접고 ‘글로벌 인생학교’ 설립

사람이 곧 자산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주변에 자연환경이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공통의 관심사까지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낙원이고 천국이다. 이처럼 세 가지 조건이 모인 접점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은 이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꿈에 부푼 가슴으로 첫 발을 내디딘 이곳, 헤이리 예술가 마을에서 그의 인생 후반부의 막이 올랐다.

이안수(54) 대표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5만평 부지에 위치한 헤이리 마을 내 연두색 건물 모티프원의 주인이다. 작가, 미술인, 음악가, 건축가 등 380여 명의 예술인들이 모여 집과 작업실, 미술관, 갤러리 등을 조성한 헤이리 마을에서 모티프원은 유일한 게스트하우스이자 창작 레지던스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이 대표가 주로 머무는 서재에 빼곡히 들어선 1만3000권 가량의 책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책들을 지탱하는 잣나무 소재의 책장과 테이블, 식탁 등은 모두 이 대표가 직접 제작한 가구들이다.

모티프원 곳곳에는 이 대표가 설계 당시 조민석 건축가와 함께 직접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방문객들을 위해 마련된 2인용 침실 5곳은 각각 다른 테마로 꾸며졌다. 욕실도 연두색, 오렌지색, 노란색 등 각기 다른 색상으로 설계됐다.

방에는 공용 거실과 마찬가지로 책장과 책, 이 대표가 직접 설계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창작이나 휴식을 위해 방문하는 예술가들이 작품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몰두할 수 있도록 이 대표는 오픈 이래로 줄곧 내부 인테리어에 신경을 써 왔다. 방마다 이 대표가 여러 해외 여행지에서 직접 공수해 온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천장에 채광창이 있어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방이 있는가 하면, 2층 공용 거실은 양 사이드 전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부양하는 느낌을 자아낸다고 이 대표는 설명했다.

이 대표는 이 곳 모티프원에 지난 1996년 여름 무렵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다. 모티프원은 이 대표가 인생 이모작을 시작한 출발선이자 쉼터다. 또 그가 작가로서 사진을 찍고 글을 집필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교류하는 일을 한꺼번에 실현할 수 있는 꿈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 방문하는 게스트들은 국적이 다양하다. 헤이리 마을에서 유일한 게스트 하우스인 까닭도 있지만 미국, 일본 등 외국 잡지에 소개된 이 대표의 이력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오는 방문객들도 있다. 이 대표는 지금까지 50여개 국가에서 게스트들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8~10회 이상 방문한 단골 고객도 꽤 많다. 대부분 모티프원에 방문하는 고객들은 이 대표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 대표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최대의 목적이 바로 이 방문객들과의 소통이다.

이 대표는 책과 수많은 여행에서 얻은 다양한 인생의 경험들을 대화로 상대방에게 전하는 일에서 삶의 즐거움을 얻는다. 그 또한 수많은 관광객들을 통해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배움의 효과 또한 있기 때문이다. 여행 온 외국인들은 이 대표와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수십 권 가량의 방명록에는 그들이 다녀간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게스트하우스 ‘모티브원’은 이대표가 인생2모작을
시작한 출발선이자 쉼터다. 이곳은 그가 작가로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꿈의 공간이다.

스물아홉 번의 이사 후 욕심 생겨

이 대표의 첫 직업은 기자였다.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잡지사 <월간여행>에 입사했다. 본래 여행을 좋아했던 그는 많은 장소를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글로 담아냈다.

<음악 저널>에서도 일했고, <디자인 저널>에서는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기자 생활은 25년간 계속됐다. 그러나 나이가 들자 이 대표에게도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 기자 생활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회사가 원하는 방식과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본인이 스스로 원하는 글을 자유롭게 쓰고 싶다는 바람도 생겼다. 평생 업으로 삼던 일을 그만두는 결정에 따른 불안감도 있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리스크를 과감히 떠안았다.

이후 휴식기를 가진 이 대표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애초 학교 공부보다 여행을 통해 ‘산 경험’을 하기 원했던 그는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는 일에 유학의 초점을 맞췄다. 높은 여행비용을 감당하기에 벅찼던 그는 여행 도중 알게 된 지인들에게 넉살 좋게 숙박 신세를 졌다. 끼니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했다.

귀국 후에는 헤이리 마을 구상 계획이 나오기 시작하며 이 대표 마음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자리 잡았다. 출판인들이 헤이리 마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이 대표는 그곳에 자신이 꿈꾸던 파라다이스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곳에는 그가 사랑하는 예술과 공동체가 공존하는 까닭에서다.

그러나 문제는 자금이었다. 헤이리 마을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땅을 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120평의 부지를 매입하는 일은 이 대표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과거에 아내와 결혼한 뒤 돈 욕심 없이 소박한 생활을 해 나갔다. “그 당시 월급쟁이는 10년 이상 일해도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며 “세 들어 살다가 이사한 경험만 29번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잦은 이사 끝에 자녀 교육 문제를 염려하는 아내의 의사에 따라 이 대표 가족은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다.

이 대표가 헤이리 마을에 땅을 사기 위해서는 그간 어렵게 마련한 아파트까지 처분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아파트 처분과 은행 대출을 비롯해 각고의 노력 끝에 이 대표는 땅을 살 수 있었다. 부지를 매입한 후에는 건물을 짓는 더 큰 작업이 남아 있었다.

마을 내 건물들은 현대적이고 개성 있는 디자인을 요구해 건축 비용이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당시 하나은행이 헤이리 마을 건축주들에게 신축 건축물을 담보로 건축 자금을 미리 대출해 주는 지원책을 마련했다. 그간 땅을 매입하고도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이라 대지를 유휴지로 방치하던 이 대표에게 길이 열린 것. 따라서 이 대표는 다시 한 번 대출을 통해 지금의 모티프원을 원하는 구조대로 설계할 수 있었다.

1.모티브원 전경.

2.2층으로 통하는 내부 계단.

3.2층 객실.

4.이안수 대표의 서재.


이 대표는 “원하는 것을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다”며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즐거움을 택한 대신 경제적인 풍요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은 이러한 인생철학 때문이다.

이 대표는 현재 주중 이용료 12만원, 주말 이용료 14만원에 해당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는 수익과 서울 내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아내의 수입을 통해 생활을 해 나간다. 건축에 든 초기 비용을 여전히 갚아나가고 있지만 특별히 생활이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즐기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축복으로 여겨진다.

모티프원은 주말에 손님이 많다. 이들은 이 대표가 좋아하는 여행을 한 곳에 머물면서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각국, 각지의 사람이 모티프원을 찾기에 직접 여행하지 않아도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이 대표는 말한다.

현재 이 대표는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 작가 일 외에 잡지나 단행본 제작사에서 청탁하는 원고를 쓰기도 하고, 중·고등학교에서 요청하는 강연에 나서 여행과 사진을 포함해 인생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모티프원 내에서는 솟대 만드는 법에 대해 강의도 한다. 회화와 입체작품 제작도 이 대표의 취미 중 하나다.

헤이리 마을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그는 마을에서 열리는 각종 전시를 기획·주관하는 마을 작가회의 회장이자, 마을 운영에 관해 논의하는 자치회의 부촌장직을 맡고 있다.

이 대표의 노후는 앞으로 ‘여행’에 할애될 것으로 보인다. “앞날이 뻔히 내다보이는 삶을 즐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대표는 “이 길 끝에 있는 모퉁이를 돌았을 때 새로운 일이 기다리는 삶을 원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여행에 동반자가 될 1962년 미국산 캠핑카 밤비2 모델이 모티프원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백가혜 기자 lita@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