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송원제 기자)


숲이 이야기를 건넸다. 복작복작한 도심 생활에서 쉬게 해 주겠노라고.
자연이 주는 위안에 사는 이 사람의 노후는 그래서 행복하다.
이 사람의 욕심은 올곧이 한 곳으로 향한다. 바로 ‘자작나무숲’이다.
한 평생 보아도 아깝지 않을 그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다.

그의 삶은 자연에서 시작해 결국 자연으로 귀화했다. 도심 생활에 손사래 치는 남자. 숲을 가꾸고 흙과 바람 내음 맡으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니 남부러울 것이 없단다. 그의 숲을 방문하면 그 심정이 십분 이해된다.

강원도 횡성군. 국도에서 벗어나 좁다란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면 ‘자작나무숲’이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횡성군 초입부터 이 팻말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문화유산이나 국립공원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숲은 개인 소유다. 원종호(58) 관장이 17년 전 맨 손으로 일군 결과다. 약 1만평 규모의 선산에 자작나무 1만2000그루를 심은 게 시작이었다. 개인적으로 숲이 좋아 조성했지만, 어느새 도심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친 현대인들이 많이 찾는 오아시스가 됐다.

처음에는 숲을 무료로 개방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방문객들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생각에 숲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훼손시키기도 했다. 부득이하게 입장료를 받게 됐다. 입장객들은 돈을 내고 방문한 만큼 숲을 조심히 다뤘다. 이곳의 입장료는 현재 성인 1인 기준 1만원. 그럼에도 방문객 수는 점점 증가한다. 방문객이 너무 많아져 원 관장이 전부 감당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다.

하루 평균 방문객은 40~50명이다. 주말에는 100명 가까이 된다. 이들에게 숲을 내어주는 원 관장의 직업은 ‘숲지기’. 한편으로 관장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운영하는 두 동의 갤러리 때문이다.

숲은 그야말로 그의 인생 후반에 다가온 동반자였다. 그에게도 다른 삶이 있었다. 원 관장은 이곳 강원도에서 나고 자랐다. 본래 시골 생활이 몸에 맞는 사람이었다.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이 익숙한 그. 대학 시절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그 때도 늘 풍경만 그렸다고 했다.

그러나 떠돌아다니며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천성에 따라 원 관장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작품에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그림보다 사진을 택했다. “내가 본 곳의 풍경을 가장 짧은 시간에 강렬하게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라며 사진으로 길을 전향한 까닭을 설명했다. 그 때부터 원 관장의 전문분야는 ‘사진 촬영’이 됐다.

물론 전업은 따로 있었다. 1980년대 초, 부친에게 물려받은 1만평 부지의 땅(지금의 자작나무숲 터)이 있었던 그는 목장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소 키우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사료 대리점도 함께 운영했다.

푸른 목초지에서 소를 키우며 인생의 제1 목표를 실현했던 그는 잠깐 동안의 전성기를 맛본 후 목장 일을 접어야 했다. 당시 국내에서 소를 수입하기 시작하며 그의 사업도 위기를 맞게 된 것. 사료대리점은 꽤 잘 나갔다. 그 때 모은 돈으로 지금의 자작나무 숲을 조성하는데 어렵사리 일조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백두산 여행서 본 자작나무 강렬한 첫 인상

그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그에게 앞으로 남은 삶의 지표가 되어줄 ‘터닝 포인트’로 작용하기도 한 순간이었다. 1990년, 그는 관광 목적으로 백두산을 방문했다. 그런데 백두산 자락 위에서 바라본 자작나무숲의 모습이 장관이었단다.

“하얀 나무가 드넓게 펼쳐 있는 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죠. 자작나무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줄기가 가늘고 앙상한데, 새하얘서 오히려 쓸쓸한 느낌을 주죠.” 그에게는 오히려 그 쓸쓸함이 가져다주는 정감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자작나무를 심기로 결심했다. 자작나무가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 같다는 예감이 밀려들었던 원 관장. 고향으로 내려와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초기에 그는 뜻을 이루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운이 좋게 물려받은 땅이 있었고, 자작나무 묘목의 가격도 당시 100~200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1만2000그루를 사다 심는데 큰돈이 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목장과 사료 대리점을 접으니 수입이 도통 없었다. 아내의 만류도 거셌다. “누가 봐도 ‘미쳤다’고 할 만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무작정 하겠다고 덤볐으니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의 신념이 그렇게 말했죠. 일생에서 적어도 한 번은 결심한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고. 어떻게 보면 고집일 수도 있겠네요.” 원 관장은 당시의 신념이 지금의 자작나무 숲을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원하는 길을 걷는 과정은 외로웠다. 본래 목장 운영을 위해 목초지로 가꿔 놓은 곳이라 그 위에 1만2000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관리하는 일이 골치 아팠다.

나무를 키우고 가지를 잘라주고 풀을 베어내며 길을 트는 등의 모든 일을 원 관장이 혼자서 해 나갔다. 관리가 워낙 어려워 심은 나무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지금은 4000~5000그루만 남아 있다.

숲에 있는 나무의 90% 이상이 자작나무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원 관장만의 작품이기에 나무는 그에게 다른 의미에서 자식 같기도 하다. 그의 숲에서는 풀과 나무 특유의 냄새가 깊고 진하게 전해져 온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놔둔 까닭에 숲에 들어서는 순간 청량한 공기와 녹음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원종호 관장이 직접 찍은 자작나무숲.


‘예술’과 ‘자연’ 두 갈래 길의 멋진 조화

나무를 심은 후 본격적으로 그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준 일은 다름 아닌 ‘집짓기’였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을 제외하고 원 관장과 아내, 딸이 살 집이 필요했다.

숲 속에 조성될 집이라 목조주택으로 지었고, 내부는 핀란드산 내장재를 사용해 꾸몄다. 당시에 2000만~3000만원가량의 자금이 필요했다. 있는 돈과 대출 자금을 전부 끌어 모았다. 그래서 만든 이 목조주택은 지금 자작나무숲의 ‘스튜디오 갤러리’가 됐다.

이 공간은 2004년부터 방문객들을 위한 휴게소로 쓰이고 있다. 원 관장이 숲을 대중에게 오픈한 시기와 같다. 그 이전의 긴 시간은 모두 숲을 조성하는 준비기간이었다. 스튜디오 갤러리는 카페로 조성됐지만 한쪽 벽면에는 책장이 있고, 내부 여기저기에 사진이 걸려 있어 작품 감상도 할 수 있다. 이곳의 관리는 원 관장의 아내가 맡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바리스타다. 직접 볶은 신선한 원두로 커피를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나무 내음 맡으며 쉬어가는 이들에게 커피는 기분 좋은 인심이다.
스튜디오 갤러리를 제외하고 이곳에는 두 동의 갤러리가 더 있다.

한 동은 원 관장이 사진작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개인 작품 전시용 갤러리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찍은 자작나무 사진이 전시돼 있다. 다른 한 동은 외부 작가 작품 초청전을 여는 갤러리로 사용된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기획전이 열린다. 이 두 채의 갤러리를 짓는데 많은 비용이 소모됐다.

설계, 재료, 인건비 등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아 한꺼번에 목표를 이룰 수는 없었다. 단계적으로 달성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원 관장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일이기에 가능했지만, 아내나 가족들에게는 큰 어려움이었을 터.

“이제서야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해졌죠. 20년 가까이 고생한 끝에 얻은 낙이라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커피를 내리는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서 ‘고마움’이 엿보이는 까닭이다.

사실 이제는 원하는 삶의 터전을 모두 이뤄놓은 연유로,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원 관장의 생각이다. “평생 먹고 살 걱정하지 않고, 일거리까지 있는데 이보다 더 성공한 노후가 어디 있겠어요? 하하.”

그는 지금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강원도 지역 일대에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송원제 기자)

숲속에 지은 예쁜 목조주택 2채는 사진작가를 꿈꿨던
나의 갤러리가 됐고 지금은 두달에 한번씩 기획전이 열리는
멋진 예술공간이 됐죠.

꿈과 현실의 조화 두 토끼를 잡다

이 넓은 땅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고민하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고민이 없었겠어요”라며 웃는 그의 얼굴에서 지난 세월 고민의 흔적이 드러났다.

숲의 고지대에는 펜션이 두 동 마련돼 있다. 각각 독채로 지어졌는데 이 펜션에 얽힌 사연을 그는 설명했다. 11년 전 그는 함께 펜션 사업을 해 보자는 타인의 제안에 이끌려 이곳에 펜션 15개동을 조성하기로 했다.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에 갑작스럽게 고비를 맞았다. 함께 펜션을 짓기로 했던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다. 결국 펜션 조성 사업은 시작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2개동만 지었다.

원 관장은 오히려 당시 사업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펜션을 15채나 지었더라면 원씨 부부가 다 관리할 수 없어 분양을 했을 것이다. 분양을 하고 나면 이익은 다른 사람이 얻고 자작나무숲의 많은 부분도 잃었을 것이라고 원씨는 예상했다.

지금 2개동의 펜션과 자작나무숲, 그리고 스튜디오 갤러리와 2곳의 전시장을 운영하는 것으로 원 관장과 아내의 일거리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이 부부는 앞으로 평생 수입이 보장돼 있을 뿐 아니라 일자리를 잃을 위험도 없다. 삶의 터전 또한 최상의 질로 확보했다. 원 관장은 숲과 함께 더불어 사니 건강도 절로 좋아지고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어느 날 갑자기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지죠. 특히 낙엽이 다 지고 난 늦가을에서 첫눈이 내리기 전에 이 숲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때의 자작나무가 가져다주는 쓸쓸한 정취를 즐기기 위해 찾는 분들이 많아요.”

원 관장은 방문객 중 절반 이상이 20~30대의 젊은 연인들이라고 말했다.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고, 어찌 보면 심심할 정도로 자연 모습 그대로인데다 볼 거라곤 자작나무와 계절에 피는 꽃들 뿐이라 젊은이들에게는 재미없게 여겨질 줄 알았다는 것. 그래서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주로 찾게 될 거라고 원 관장은 애초에 예상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젊은 연인들이 색다른 체험을 위해 방문한 후 사진도 찍고 감상 후기를 블로그에도 남기며 입소문을 낸다고 했다. 숲 주인의 입장에서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숲의 생명력이 질기다고 표현했다. 그대로 놔두면 알아서 잘 흘러간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원 관장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대로 숲이 훼손되지 않고 꾸준히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람들이 이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정신적인 기쁨을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 관장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터다. 숲에서 때로는 사람을, 때로는 자연을 만나고, 숲에 동화돼 평안하고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축복이자 최대의 행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이 많아도 본연의 고요함은 잃지 않아야 한단다. 그게 이 숲과, 무성한 자작나무의 묘미다.

백가혜 기자 lita@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