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아이고~ 식사는 하셨습니까?” 시골의 구수함과 인심이 팍팍 느껴지는 그의 첫 인사가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정겨움을 한껏 안겨줬던 가래실 버섯농원의 대표 정낙헌(58)씨.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에서 느타리버섯을 재배하고 있는 정낙헌 김영수(58)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설이면 찾아오는 손녀를 기다리던 할아버지의 포근함이 묻어나서 일까. 자신이 일궈낸 느타리버섯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느낄 수 있는 시골 농부의 자부심 때문일까. 첫 출발부터가 흥미롭다.

쌀쌀했던 겨울 날씨가 한풀 꺾이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새해, 주변이 산으로 둘러 쌓인 추곡리 산두릅 마을은 평온하고 아늑했다. 도착했다는 전화 한통에 정낙헌 대표가 한 걸음에 마중을 나왔다. 화창했던 날씨만큼이나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역시, 수화기 너머로 들렸던 그의 정겨움이 현실로 와 닿는 순간이다.

정 대표의 사무실로 안내를 받고 자연스레 ‘귀농’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몇해 전 부터 베이비부머 세대들에게 귀농은 큰 관심거리였고, 은퇴 후 제 2의 인생을 개척하는데 우선순위로 꼽히고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정 대표는 이 말에 특유의 미소를 거둬들이고 잠시 진지해졌다. 이제 ‘시골 농부의 자부심’을 볼 차례다.

“‘농사나 짓지 뭐..’라는 생각으로 귀농하면 절대 안돼요. 몇 년 전에도 귀농 바람이 불어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현재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 이유는 모두가 실패했지만, 이를 이해하고 버틸 수 있는 정신력, 육체적 노력, 자본력이 없어서였겠지요. ‘농사나 지어볼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사람 좋은 미소만 짓던 정 대표에게서 볼 수 있는 진지함과 단호함에 궁금증이 샘솟았다.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그는 어떤 마음과 노력으로 이 느타리버섯 농가를 일궈낸 것일까 생각하던 찰나, 그의 찢어진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흙투성이 찢어진 점퍼, 그을린 얼굴과 투박한 손까지 말이다. 인터뷰 자리에는 고운 피부와 단아한 외모의 부인 김영수 씨도 함께했다. 본격적으로 이들의 귀농생활에 대해 빨리 들어봐야겠다는 조급함마저 든다. 때는 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기-외환위기로 오랜 금융인 생활을 접다
“요즘에야 구조 조정에 대한 얘기가 많지만, 1970년대만 해도 은행에 들어가면 정년 퇴임때 까지는 다닌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IMF가 왔다는데 금융계 사람조차 그게 뭔지 잘 모를 정도로 불시에 닥친 일이었지요. 갑자기 기업들이 망하고, 실업자들이 쏟아졌어요.”

당시 동화은행에 재직중이던 정 대표는 IMF 1년 후, 기업들한테 빌려줬던 돈들이 은행에 전이되면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아무 대책 없이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드는 생각이 ‘쫓겨나지 않고 있을 직장이 뭐가 있을까’였는데 농사 밖에 업더라고요. 유능한 CEO라도 사업이 망할 수 있는 건데 농사는 내가 열심히만 한다면 쫓겨나거나 망하진 않을 테니까요.”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무식해서 용감했다”고 운을 뗀 부인 김영수 씨는 농사가 뭔지도 몰랐기에 귀농을 하자는 남편의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취직은 하기 싫다는 남편, 장사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쿨’하게 오케이했단다. 당시 마흔 다섯이었던 동갑내기 부부는 그렇게 귀농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경기도 농촌진흥청에서 귀농 교육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 대표가 일주일 간 교육을 받았다. 은퇴 후 귀농을 하려고 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많이 앞당겨진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많고 많은 농작물 중에 느타리버섯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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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받으면서 생각해 보니 땅도 없고 아무런 준비가 안돼있더라고요. 그런데 느타리버섯 수확은 회전이 빠른 고소득 작물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거다 싶었죠. 사실 당시에는 느타리버섯이 어떻게 생긴 지도 몰랐어요.”

정 대표가 귀농을 준비하던 90년대 말 농촌의 큰 소득원은 담배, 고추, 누에고치였다. 특히 뽕나무를 길러 누에고치를 키운뒤 실크를 뽑는 산업이 크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생실이 수입되면서 누에산업이 망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진흥청에서 뽕나무 가지를 잘라 느타리버섯 종균을 발라 올려놓으면 버섯이 나오는 것을 개발했고, 느타리버섯이 상업화 단계로 접어들던 때였다.

일주일간의 교육을 마친 후, 정 대표는 느타리버섯 재배를 배울 수 있는 멘토를 만나기 위해 광주, 여주, 이천의 농업기술센터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구했다. 다행히도 광주 농업기술센터에서 사람을 소개시켜줬고, 첫 번째 멘토의 집 두동을 빌려서 정 대표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기술력을 배우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 때가 1998년도였고, 약 1년 반동안 일을 배웠다. 이후, 정낙헌 김영수 부부의 본격적인 귀농 생활이 시작된다.

귀농-11년의 노력 연 매출 15억 부농이 되다
귀농을 준비할 당시 정낙헌 김영수 부부는 분당에 있는 아파트 한 채와 작은 자동차 한 대가 전부였다. 귀농을 결심하고 아파트를 처분했지만 주변에서는 이들을 뜯어 말렸단다. 그러나 직장 생활의 허무함을 느껴 절대 다시 회사에 가고 싶진 않다는 남편과 그를 이해하는 아내가 있었기에 두 부부에게 만큼은 나름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아이들 교육은 당시 작은애가 중학교 1학년 이었는데 분당을 떠나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는 게 어떨지 의사를 물었더니 유학을 선택해 부부만 시골로 내려왔다. 2000년, 천 평의 땅을 사는데 1억 2000만 원이 들었고, 재배 시설을 짓는데 2억원 정도 투자해 산두릅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농업용으로 구입하는 땅은 특별한 제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부동산을 통해 매매할 수 있었다. 보통 시골 땅 값이 싸다고 하지만 차후의 비용을 고려해 소비지가 가까운 경기도 광주를 선택했다.

그렇게 느타리버섯 재배가 시작됐고, 처음에는 승용차로 가락시장에 내다 팔았다. 온 정성을 다해 키운 자식들인데 가락시장에서 일반 상품처럼 막 던져 정 대표는 마음이 상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제가 키운 작물들이 그렇게 취급당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광주에서 15명을 모아 분당 하나로 마트에 공동 출하를 하기로 했어요. 가락시장은 품질에 따라 가격을 주는데 하나로는 비슷한 가격을 주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가락시장에 더 좋은 물건을 줬고, 자꾸 나쁜 물건이 나가니까 하나로 측에서 문제제기를 했지요. 그러나 제 계산은 달랐어요. 내가 좋은 물건을 더 많이 내서 주면 된다고 생각 한거죠.”

다시 소규모로 몇 명만 모아서 느타리버섯을 출하 했고, 그때 하나로 담당자가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도 내달라고 해서 내주고, 홈플러스도 납품하게 됐다. ‘좋은 물건만 약속해준다면 매출에는 문제 없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비롯된 계산이다.

그렇게 살다보니 버섯 좀 사달라고 쫓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퍼져 나가다보니까 물건만 생산하면 가져가는 곳이 많아 바쁠 지경이니 말이다. “농업을 쉽게 생각하면 안되지만 기본만 지킨다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현재 천 평 정도의 부지에서 매년 15억 원의(순이익은 약10%) 매출을 올리고 있는 정 대표는 말한다. “지금은 나를 말렸던 친구들이 전부 부러워해요. 매일 등산 가는 것도 지겹다고 놀러오곤 하죠.(웃음)”

시련-하우스 붕괴·기술부족 숱한 어려움
첫 귀농생활, 정낙헌 대표가 혼자 눈물을 삼켜야 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느타리버섯 재배를 기다리던 겨울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하우스가 무너진 것이다. 그때 버섯도 잘 났고 따기 직전이었는데 눈 때문에 가운데가 주저앉아 하나도 못 건졌던 아픈 기억이 있다.

이건 약과다. 병 안에 버섯을 키우면 한 곳에다 배양을 많이 한 후 꺼내서 쓸 수 있으며, 다른 곳에 곰팡이가 전이되지도 않아 버섯을 기르는데 유용하다. 그러나 귀농 초기에는 병이 도입 안됐을 때라 균상재배를 했다. 당시 버섯을 재배하기 위해 균상을 한번 넣는데 100만원 정도 들었다. 종균이 잘 먹을 줄 알고 기대가 컸으나 버섯이 나오지 않아 정 대표는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남들 앞에선 창피해 내색하지 않았지만 밤에 버섯 앞에 앉아 ‘왜 안 나올까’ 고민하다가 운적도 있어요. 화가 나서 집어던지고 통곡을 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실패했어요. 그 무거운 걸 버리는 것도 일이었지요.”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게 밑거름이 돼서 지금의 가래실 버섯농원이 있다”고 말하는 정 대표 부부는 당시를 회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언-“귀농생활 성공하려면 멘토를 만들라”
“농촌 생활이요? 농사만 잘 짓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 재배사에는 겨울에 보일러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꼭 제일 추운 날, 추운 새벽 2시에 고장 나더라고요. 그냥 방치하면 농사를 망치게 되죠. 한 밤중에 이걸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하.”

도시도 아니고 시골에 기술자가 금방 올 수도 없다. 간단한 구조물 만드는 작업에서 뿐 만 아니라 용접, 보일러 고치기, 모터 돌리는 일 등 모든 기계를 다루는 데 능숙해야 되는 게 시골생활이다. 정 대표는 슈퍼맨이어야 했다.

“음식점에 고추 반찬이 나오는 거 보면 대단하지 않나요? 고추는 여름에 나오는 건데 한겨울에 나온다는 건 온도를 20도 이상 올리고 투광이 될 수 있도록 햇빛을 줬다는 얘기예요. 또 여름에는 온도를 15도 까지 내려야한다는 거죠. 농사,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정 대표는 시골 생활을 하려면 농사에 대해 잘 아는 멘토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표고버섯을 하는 아랫집 사람이 그의 멘토다. 한 예로 모터가 갑자기 고장이 났을 때 내 지식으론 아무리 해도 안될 때, 아랫집은 툭 건드리면 금세 고쳤다는 후문. 농촌 사람들은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고수다. 많은 도움과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든든한 멘토 덕분에 정 대표는 시골에 정착하는 데 큰 힘을 얻었다.

퇴직 후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정 대표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미리 준비한 사람들은 농촌 생활이 쉽습니다. 그러나 ‘농사나 짓지’라는 생각은 실패의 지름길이죠. 대부분 사회경험이 상당히 있는 베테랑들이기 때문에 판매에 능하거나 기계를 다루는 기술 등이 있어 자신의 능력을 응용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부인 김영수 씨도 거들었다. ‘부부가 같이 와서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 김씨가 꼽는 중요사항. 남자만 내려와서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거의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단다. 생활적인 면도 있겠지만, 시골일 자체가 농작물 포장 등 여자들이 해야 하는 잡일이 많다. 시골일 이라는 게 혼자보다 둘이 좋고, 또 여럿이 해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루일과를 끝내고 부인과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곤 한다는 정 대표. 처음 여기 올 때만 해도 한 잔 정도밖에 못 마시던 아내의 주량이 반병으로 늘었다며 특유의 미소를 짓는다. ‘부인은 이곳에서 나에게 최고의 친구’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앞으로 계획이요? 지금 이대로가 정말 좋습니다. 힘이 닿는데 까지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일을 해야 건강하다니까요!”

이효정 기자 h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