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코노믹리뷰 이미화기자]


한 개그맨이 TV에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땐 이미 늦은 거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는 ‘너무 빨라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토리있는 명품식품만을 내놓겠다며 식자재 유통의 차별화를 선언한 더블피쉬커뮤니케이션즈의 이기환(41) 대표가 그랬다.
이 대표는 이에 대해 오히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한다. 이제 막 마흔 줄에 들어선 그는 벌써 인생2막을 넘어 인생3막을 꿈꾸고 있었다. 빨라서 오히려 좋았던 그의 때이른 은퇴 이야기에 관심이 쏠린다.

남들보다 한 10년, 20년은 빠른 것 같다. 37살에 은퇴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기환 대표는 “무모하다는 소리 많이 들었다”면서도 “최고의 시점에 모든 걸 내던져서 다시 시작한다면 뭘 하더라도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한때 잘나가는 증권사 홍보맨이었다. 미래에셋그룹의 국내외 브랜드 전략과 광고마케팅을 총괄하는 브랜드 전략실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증권업계에서 32세로 최연소홍보팀장이란 타이틀을 얻을 만큼 유능함을 인정받았다. 억대 이상의 연봉을 받으며 누가 봐도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8년 ‘더이상 늦어져선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마음에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무모하게 바라보며 사직을 만류하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대했다.

“증권회사에서 일하면서 굉장히 남들보다 은퇴에 대한 개념을 미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은퇴를 준비하는 금융상품을 알리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은퇴 후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그는 당시 하던 일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조건도 좋고 은퇴를 생각할만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회사도 최고의 정점에 올라있던 상태여서 어느 때보다 일에 대한 성과나 보람이 크게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업무적으로 성공을 거듭할 때마다 자기만의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커졌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현실에 자꾸 안주하다보면 하루하루 책임질 부분도 많아지면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저지르자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내 사업 하고싶어 사표 던지고 인생 ‘리셋’
회사를 나온 후 ‘혹시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하는 잠깐의 후회도 들었다. 그렇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은퇴자들보다 조금 빨리 은퇴를 시작한 탓일까, 그는 느긋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막연히 자기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기왕 모든 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 확실한 원칙을 세우고 기초를 탄탄히 다지기로 했다. 사업 아이템을 정하기전 예전에 회사생활을 하면서 배웠던 중요한 원칙을 떠올려 확고한 기준을 세웠다.

첫째 산업자체가 성장을 지속해야 하는 분야여야 하고 둘째 그 산업이 아직 허점이 많아 후발주자에게 기회가 남아 있어야 했다. 셋째는 자사의 능력이 확실히 경쟁사와는 차별화 되는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었다. 얼마 후 그는 아이템을 선정하고 회사를 설립했다. 해외에서 인기를 끌었던 친환경 폰트 개발 사업이었다. 글자에 구멍을 뚫어 토너를 절감하는 방식으로 폰트를 개발해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초기 회사 설립비용은 1억 원이었다. 그나마 그는 회사시절 연봉이 많아 저축도 일부 해뒀고 또 증권사 직원으로서 펀드 투자를 해 자금적인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설립초기 벤처기업으로 인정을 받으며 기술보증기금에서 2억 원을 지원 받을 수 있었다. 출발은 꽤나 순조로웠다.

그러나 어떤 초심자도 시행착오 없이 단번에 경지에 오르는 건 무리다. 이 대표도 어김없이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처음엔 친환경 폰트 사업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면밀하게 3가지 원칙과 비교해보니 이내 허점이 노출됐다. 뜨는 사업이어야 한다는 첫 번째 조건과 해당 분야에서 틈새가 존재해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부합했지만 세 번째 조건인 타사와의 경쟁력에 있어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친환경 사업자도 아니고 폰트 개발자도 아니었다.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이다. 대신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전략과 마케팅 분야였다. 물론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폰트개발 중 글자의 테두리의 아웃라인을 쳐서 가독성을 높이는 기술에 대한 특허를 따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그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과감하게 폰트 개발 사업을 접었다.

‘식객’ 자료제공 소문난 전문가를 만나다
다시 원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친환경 관련 사업을 하면서 그는 우연히 친환경 식재료 유통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이다. 역시 3가지 원칙을 잣대 삼아 꼼꼼히 따져보기 시작했다. 친환경 식자재의 유통사업이 첫째 조건에 부합한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먹는 것은 시대를 타지 않는 인간 고유의 행위다.

인간이 먹는 행위를 스스로 중단하지 않는 한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커질 것이다. 이 대표는 소득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산업의 성장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둘째 그는 식품유통을 경험하면서 한국의 식재료 중에서도 우수한 품질의 재료들은 일본으로 수출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한국의 식자재 유통구조는 편리하지만 저렴한 상품위주로 유통되고 있는 틈새가 있었다. 만약 소비자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해 신뢰를 줄 수 있는 유통구조를 가진 기업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세 번째 전문성이다. 자칫 이 부분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지만 황교익이라는 전문가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농민신문 편집장 출신으로 우리나라 음식에 관해서는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인물이다. 허영만 화백이 <식객>을 집필할 당시 20년 이상 활약한 그의 취재수첩의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이기환 대표는 음식칼럼리스트 황교익씨를 찾아가 사업구상을 제안한 뒤 ‘명품식탁’을 운영할 수 있었다(맨 위). 어려운 시절 책상위에 써 붙여두고 위안을 삼았다는 ‘돌 위에서 3년’이란 일본 속담(위). 그는 또한 스토리가 있는 식품유통사업을 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음식과 요리가들을 찾아 다녔다(오른쪽).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이런 기회를 살릴 수 있느냐 인데 혼자의 힘으로는 힘들지만 뜻을 함께 하는 전문가 집단이 힘을 모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그의 칼럼을 읽으면서 존경심을 가져왔던 이 대표는 황 씨를 찾아갔고 그의 사업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명품식탁’이다.

명품식탁은 식품유통브랜드로서 유명 맛 칼럼리스트 황교익씨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깐깐하게 고른 식자재만 취급하면서 입소문이 자자해졌다. 양구 펀치볼 지역에서 생산한 유기농 시래기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온라인 쇼핑몰로 운영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방식을 취한 것은 식품사업에 대한 장기로드맵 상 최초의 사업 형태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스토리가 있는 먹거리로 성공을 빚어내다
전략은 차별화의 다른 이름이다. 명품식탁은 황교익씨가 추천하는 상품으로 구성된 ‘최고의 식탁’ 외에도 젊은 MD(상품기획자)들이 추천하는 ‘맛있는 식탁’으로 구성된다. 최근엔 까칠한 속초남자가 만든 정직한 젓깔(까도남 젓갈), 청양고추를 넣어 칼칼한 싸나이 간장게장(백포스 간장게장), 말랑말랑 불에 구워먹는 육포(촉촉이 육포), 세상에 하나뿐인 완벽한 소금(소금의 진실) 등 개성있는 브랜드명과 재미있는 패키지 디자인, 편리한 소포장을 특징으로 한 식재료들이 개발되고 있다.

명품식탁의 제품 입점 절차는 무조건 발로 뛰는 것이 전략이다. 황교익 선생과 MD들 그리고 소싱관련 외부 네트워크 팀과의 정규 회의를 통해 후보 제품이 선정되면 무조건 현장 방문을 해 꼼꼼히 따지고 입점 가치만 있는 제품만 엄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명품식탁은 입소문을 통해 명성이 자자해지고 있다. 별다른 광고가 없어도 오픈 1주년이 채 되기도전에 월매출 1억원을 돌파하고 두 자리수의 매출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오는 3월부터는 백화점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하고 소설커머스인 그루폰과 제휴를 맺고 해외시장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이 대표가 사업을 시작한 지 3년만이다. 그는 지난 3년의 시간을 ‘보약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돌 위에서 3년’이라는 책상위에 일본 속담을 써 붙여뒀는데 공교롭게 지금 되돌아보니 그 말이 맞는 듯하다고.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차가운 돌 위에서 3년을 보내듯 지내야 성공한다는 일본 속담입니다. 그동안 고생을 하면서 글귀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는데 3년이 되는 지금 시점에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이 대표는 앞으로 식품유통분야가 전망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지금의 사업을 확장시켜 해외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식자재’들을 유통하는 의미있는 회사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이 회사를 어디까지 키우고 싶다기 보단 이런 방향으로 가다보면 스토리가 있고 몸에도 좋은 건강한 먹거리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의미 있는 회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토바이 타고 세계 도는 인생3막을 꿈꾼다
아직은 젊은 이 대표의 꿈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회사명을 ‘더블피시’로 쓴 것도 한 번에 두 마리의 물고기를 얻는 회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그런 자신을 “욕심이 많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더블피시’는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로도 풀이된다. 빵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굶주리고 배고픈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일화처럼 선행을 베풀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회사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이 대표의 2막은 현재 진행중이다. 그는 아직 젊다. 그래서 3막을 꿈꾼다고 했다. 10~20년후 쯤 되리라. 그때면 진정한 의미에 ‘50+’가 될 것이다. 이 대표는 세계적인 금융 석학 짐로저스의 삶을 로망으로 삼고 있다. 짐 로저스는 은퇴후 오토바이를 타고 전 세계 여행을 하며 세계 현상 중 가치가 있는 부분에 투자하길 즐겨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대표의 인생 2막의 결과는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인생 3막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전 세계를 유랑하며 가치 있는 투자를 하는 모습을 그려보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의 성공적인 2막과 3막을 기대해 본다.

김은경 기자 keki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