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무척이나 이른 시각에 나를 깨운 것은 꿈결인 듯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사내는 좋은 목소리를 가졌고, 그 좋은 목소리에는 그가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 목소리로 듣는 청혼이었으니, 달랑 세 번의 만남으로 던진 청혼이었음에도 농담이나 장난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독신주의자도 아니었지만, 굳이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은 상태였던 나는 아주 오랜만에 듣는 청혼이 새롭고 반갑고 기꺼웠던 모양이다. 인도 대신 마라도라는 먼 이국 같은 섬에 와서 시시하게 돌아가지 않아도 되게끔 모종의 사건을 만난 듯 살짝 흥분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사내가 늘 우려먹는 결혼의 비결대로 나는 낚시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던 것이다.

술도 잠도 덜 깬 채로 나는 시인 안현미에게 문자를 보냈다. “누가 결혼하재.” “하자는 놈 있을 때 해라.” 앞뒤 내용을 다 자른 채 보낸 나의 문자에 현미 역시 아무 물음도 없이 단순명쾌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세상에 널린 게 남자고, 그중에 한 남자가 청혼했을 수도 있고, 하자면 하면 되지, 뭐 별거냐’는 식의 답장인 셈인데, 이미 미끼를 물어버린 나는 그것을 현자 같은 시인의 위대한 전언쯤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뒤에 따라붙은 “너도 나처럼 당해 봐야지”라는 문자를 현미식의 사랑스러운 악담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게 결정적 문제였다는 것을 그땐 알래야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여자도 결혼하기 전에 뒤웅박의 정체를 알 수가 없는 법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다음에 이어지는 일들이 코미디에 가깝다.

나는 난청이다. 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비염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인지 아닌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청력도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대학병원에서 청력 검사를 해보았는데, 일반 성인의 청력 세포보다 1/3이 적다는 진단을 받았고, 보청기 착용을 처방받았다. 비싼 보청기를 할 형편도 안 되었고, 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다. 애써 따려고 하면 장애등급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일상생활에는 크게 지장이 없으나, 사람의 말소리를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소리가 뭉개져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오정’이라고 불리곤 했는데, 현미는 내가 들었다는 청혼이 네 귀가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으니, 확인을 해보라고 했다. 정말 그랬을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내 귀는 잘못한 게 없고, 기억도 생생한데, 한 가지 께름칙한 건 그 일이 취중에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궁금한 것은 사내의 진심이었다. 이래저래 나는 사내를 또 만나러 가야만 했다. 그다음은 진짜 코미디다.

사내는 혼자 찾아온 나를 맞아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혼자 찾아간 나도 기원정사에서부터 횟집까지 걸어가는 밤길 내내 당황스러웠고, 횟집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도 당황스러웠다. 그 모든 당황스러움을 다 끌어안고 기어코 문을 열고 들어가 쭈뼛쭈뼛 자리를 찾아 앉고는 사내와의 대면의 시간을 맞닥뜨렸으니, 이미 그때부터 결론은 명약관화한 것이었던 듯하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그 무거운 기류가 더 이상 힘들게 짓누르기 전에 얼른 일을 해치우자는 심사로 나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내게 한 청혼이 진심이었냐고. 사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뜸은 부정적이고 불안하다. 그 뜸의 시간 동안 나는 절로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러면 그냥 “하하하” 웃고 돌아가면 그만이지. 그런데 말이다. 돌아오는 사내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긴꼬리벵에돔만큼이나 상상을 배신하는 사내라니.

“기억이 안 납니다.” 사내는 캔맥주를 만지작거리면서 방바닥만 쳐다보며 말을 내뱉었고, 나는 사내의 정수리만 쳐다보며 이 맥 빠지고 쪽팔리는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사내는 또 얼마간의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덧붙였다. 무언가 이 위험천만한 상황을 수습할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사내도 다급히 느꼈음이 분명하다.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그 말을 했다면 맞을 낍니다.” 이쯤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던 나는 다시 주저앉았다. 사내는 시종일관 방바닥만 쳐다보다 그 말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같아서는 무슨 그런 말이 있느냐, 어쩌고저쩌고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고 들 테지만, 그땐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사내의 눈빛도 만족스러웠다. 헛말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적어도 그런 걸 농담 삼아 던지는 양아치는 아니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말 한마디로 내가 실례가 많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온몸으로 쪽팔림을 뿜어내는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은 사내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뭐, 기억이 안 나서 섭섭하긴 하지만, 당신이나 나나 술이 과한 상태였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청혼을 안 한 건 아니고, 했으되 기억이 안 날 뿐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내 심정은 그랬다. 바로 다음 날, 나는 육지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그날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린 맛없는 캔맥주를 주섬주섬 어색하게 마시며 두서도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던 것 같다. 그중에는 집을 짓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직접 집을 짓고 살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고, 사내는 자신이 직접 집을 지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사내는 최소한 그때 그 횟집보다는 잘 지을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했고, 나는 제힘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능력자가 내게 청혼을 한 것에 대해 매우 뿌듯해 했다. 그것이 복선이었나 보다. 우리가 평택에서부터 제주시를 거쳐 화순에 내려와서까지 인테리어와 리모델링을 온전히 우리 힘으로 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건축가가 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등굣길 버스 안에서 건축 중인 어떤 건물을 보고 눈물 흘린 적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이후부터 나는 집을 짓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으니 건축가는 나의 최초이자 유일한 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건축과를 가고자 했다. 그러나 성적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시 대구에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건축과는 사립대뿐이었다. 유일한 국립대인 경북대학교 건축과는 성적이 모자랐다. 집안 형편이 허락지 않아 그 어떤 과를 가든 경북대 외에는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몇 번의 눈물 바람 끝에 건축과가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다고 아무 과나 들어가서 아무 과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고 4년 내내 운동만 하다가 반년 유급당한 후 교수들이 제발 조용히 나가달라고 답을 가르쳐주며 졸업시험을 보게 해서 겨우 때려치울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게 한이 돼서 나는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가게를 뜯어고치며 현장체험을 해 온 모양이다. 그게 한이 되어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사내와 만나 집을 짓기 위한 예행연습을 해온 모양이다.

그렇게 중매쟁이도 없이 선을 본 우리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언제가 될지 모를 만남을 기약했다. 그러면서 사내는 기특하게도 다음 날 떠나는 날 위해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여전히 어색하긴 했지만, 살짝 연애하는 기분이 들어 절밥을 마다하고 짐 싸들고 사내의 횟집으로 갔다. 요리 솜씨 좋은 사내가 준비하는 밥상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설령 요리 솜씨가 좋지 않더라도 누군가로부터 나만을 위한 식사에 초대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로선 난생처음이었다. 엄마 말고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주겠다는 사람이 여자도 아니고 남자이니, 트렁크 끌고 가는 내 발걸음은 절로 흥에 겨웠다. 그러나 코미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숫제 블랙 코미디다.

횟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탁자 위엔 아무것도 없다. 1차 실망.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무언가를 썰어 내놓는데 소라나 멍게, 전복 같은 거였다. 2차 실망. 그때만 해도 나는 이런 것들을 잘 먹지 못하던 분지 출신 촌놈이라서 별로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화구 위에선 무언가가 막 끓기 시작하는데, 라면 냄새가 풍겨오는 것이었다. 3차 실망. ‘설마, 설마’ 하면서 꾸역꾸역 참고 있는데, 믿고 싶지 않지만 그 라면 냄비가 내 앞으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4차 실망.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라면도 곧잘 먹던 시절이었음에도 나의 순도 높은 기대치가 연속적으로 푹푹 꺾이는 상황을 맞닥뜨리니 그 맛 나던 라면도 반이나 남기고 말았다. 사내는 아무 말이 없다. 5차 실망. 결혼 후에 들어 보니, 아침 첫 배에서 내린 손님들이 밀려 들어와 혼자서 정신없이 장사하느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해서 그랬단다. 사내는 그때나 지금이나 꼭 필요한 순간에 침묵함으로써 곧잘 화를 부르곤 하는데, 이건 평생 가도 못 고칠 중증 중에 하나다.

그렇게 전날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먹다 남긴 라면과 거의 손대지 않은 회 접시를 뒤로하고 나는 섬을 떠났다. 사내를 떠났다. 배를 타고 모슬포로 나오면서 나는 사내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라면도 라면이지만, 그때만 해도 내게 마라도와 평택은 머나먼 타국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멀어져가는 마라도를 바라보며 잠시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선사한 섬에게 부디 잘 있으라는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육지로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사내를 까맣게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