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최근 석유 업계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만큼이나 무섭고 대책 없는 것이 확산하고 있다. 바로 '비관론'이다.

코로나19 재확산 전까지만 해도 화두는 석유 수요의 회복 시점이 언제인가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에너지 업계 안팎으로 석유 소비 회복 자체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체념의 목소리가 나온다.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불확실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수요 회복 전망은 무의미하다는 평가다. 최근 국제유가가 일부 반등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지만, 정제 마진과 국제 유가도 박스권 내 횡보세만 나타내고 있어 우려가 커지는 중이다.

지난 14~15일(현지 시간)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석유수출국기구(OPEC)·국제에너지기구(IEA) 등은 차례로 석유 수요 관련 전망을 발표했다. 암울한 전망이 잇달아 나오면서 시장은 침잠하는 분위기다. 

세계 최대 석유 기업, '석유 시대 종말' 선언

세계 5대 석유 기업 가운데 하나인 영국 BP는 아예 석유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BP에 따르면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석유 소비는 코로나19 이전 수준까지 회복하지 못할 전망이며, 규모나 속도 면에서 차이가 존재할 뿐 감소세는 거스를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석유 수요는 지난해 정점을 찍었으며. 이제 내리막길 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이다.

BP는 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3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그 어떤 경우에도 석유 소비가 이전처럼 늘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석유 소비는 ▲평상시 기준 2030년부터 급감 ▲탄소 배출권 가격 급등 시 2050년까지 50% 격감 ▲탄소 중립(온실가스 순 배출량 0) 시대 80%까지 감소 등으로 전망됐다. 

이와 관련, 박영훈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 16일 '어떤 경우에도 원유 소비 증가는 없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BP의 이번 전망을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석유 업체가 내놓은 전망이라 더욱 충격적인 가운데, BP는 탈(脫)석유를 목표로 신·재생 에너지 업계에 뛰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BP는 올해 6월 석유화학 사업 부문을 매각했으며, 석유 생산량을 감축하는 대신 해상 풍력 프로젝트와 전기 자동차 충전소 사업 등 저탄소 에너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OPEC, 돌아선 낙관론자

같은 날 OPEC도 월간 보고서를 발간, 올해 세계 원유 수요에 대한 전망치를 다시 하향 조정했다. 

OPEC은 지난달까지만 해도 "내년에는 코로나19 확산이 대부분 억제되면서 세계 경제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으나 이달에는 "세계 경제가 구조적인 변화를 맞을 것"이라며 "2021년 말까지도 경기는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정반대 입장으로 돌아서, 시선을 끈다.

OPEC에 따르면, 2020년 원유 수요는 지난해보다 하루 평균 950만 배럴 가량 줄어든 9020만 배럴에 그칠 것으로 예측했다. 감소 폭은 전월 예상치인 910만 배럴보다 40만 배럴 더 커졌다.

구체적으로 OPEC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원유 수요 전망치를 일 평균 약 10만 배럴 높여 잡은 반면 비(非) OECD 국가들의 경우 아시아의 원유 소비량이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으로 꼽히는 중국의 경우 지난 4월부터 원유 시장 전반을 지탱할 정도로 기록적인 원유 수입량을 기록했으나, 9월 및 10월 일도분에 대한 수입은 급격히 줄어든 모습이다.

한편 내년 원유 수요는 올해보다 하루 평균 660만 배럴 늘어난 9690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이 역시 지난달 예상치보다 40만 배럴 정도 적어진 수준이다.

이러한 가운데 올해 원유 생산 전망치는 상향 조정됐다. OPEC은 지난 6월 미국의 산유량이 개선된 점을 고려해, 비 OPEC 산유국들의 원유 생산에 대한 추정치를 일 36만 배럴 증가한 수준으로 조정했다. 또 OPEC에 따르면, 지난달 원유 생산량은 전월 대비 하루 76만 배럴 많은 2405만 배럴로 추산됐다.

IEA, "코로나19 변수 자체가 시장 전망을 어렵게 한다"
▲ 국제에너지기구(IEA) 홈페이지 캡처. 출처=국제에너지기구(IEA)

IEA 또한 OPEC과 비슷한 전망을 내놓았다.

IEA는 15일 월간 보고서를 발간, 2020년 세계 원유 수요가 전년 대비 하루 평균 840만 배럴 줄어든 9160만 배럴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감소 폭은 지난달 발표한 전망치보다 30만 배럴 확대됐다. 올해 3분기와 4분기 원유 수요도 각각 전월 예상치 대비 일 평균 10만 배럴과 60만 배럴 감소했다.

앞서 IEA는 지난 5~7월 코로나19발 수요 침체가 곧 해소될 것이라며 원유 수요 전망치를 거듭 높였으나, 유럽을 중심으로 코로나19 2차 확산이 본격화하면서 이달까지 2개월 연속 하향 조정했다. 

IEA는 이번 보고서에서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모습이다.

IEA는 "코로나19발 불확실성이 완화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며 특히 유럽 내 코로나19 재확산을 지적했다. 미국의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증가세가 둔화되고 한국과 일본의 상황 또한 개선되고 있는 반면,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락다운이 이어지면서 글로벌 석유 수요 회복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있다는 지적이다.

IEA는 "원유 시장은 예상보다 더 취약해질 것"이라며 "코로나19 확산세로 (원유 시장의) 앞길은 가시밭길"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앞서 IEA는 지난달 보고서에서도 "코로나19 확산과 향후 원유 증산 가능성으로 원유 수요에 대한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다"며 "이는 원유 시장에서 재조정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편 IEA는 "재택 근무의 증가 역시 석유 수요를 줄이는 요인일 수 있으나,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대중 교통 이용을 자제하고 자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했다"며 "전례 없는 변수인 코로나19로 원유 수요 전망 자체가 어렵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IEA는 지난 7월 OECD 산업용 원유 재고가 사상 최대 수준인 32억2500만 배럴을 기록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생산·제조 등 산업 활동의 가동률이 낮은 것을 의미한다.

원유 공급은 계속 늘어나는 반면 수요 회복은 정체되면서 글로벌 석유 업계의 전망이 취약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로 지난 8월부터 OPEC+의 원유 감산 규모 축소 효과가 가시화됐다는 분석이다. IEA에 따르면, 지난달 OPEC+의 산유량은 7월 대비 일 130만 배럴 정도 늘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한편 세계 정유 설비 가동률의 회복은 멕시코만 일대 미국 석유 시설들의 허리케인발 셧다운과 타 지역 시설들의 정기 보수 영향으로 다음 달까지 둔화될 것으로 예상됐다.

중국과 인도의 정유 공장 가동이 지난 7월 감소했고, 미국의 경우 지난달 허리케인 '로라' 때문에 멕시코만에 있는 원유 시설 310개가 가동을 중단하면서 원유 생산량이 일 평균 156만 배럴 줄어들기도 했다. 멕시코만 일대 원유 공급량의 84%가 증발한 셈이다.

다만 내년 원유 수요는 올해보다 일 평균 550만 배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달 전망치보다 30만 배럴 상향 조정된 수치다.